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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공연 이야기

도로시 딜레이를 기리는 글

by 매들렌 2022.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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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딜레이 생전 모습
Legendary violin teacher, Dorothy Delay (1917.3.31-2002.3.24)

 

 

도로시 딜레이 사후 20년 기념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바이올린 교육의 대명사인 도로시 딜레이. 올해는 그녀 사후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녀를 기리며 생전에 그녀가 행했던 교육법에 대해 파헤쳐본다. 그녀의 교육법은 미래지향적이었지만 탁월했고 수많은 명 바이올리니스트들을 길러냈다. 

 

 

그녀에 대한 평가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학교의 교수이자 동 대학의 예비학교(영재학교)의 교사였던 도로시 딜레이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던 선생이다. 그녀의 제자들 명단에는 과거 수십 년 동안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명성을 얻은 이작 펄만, 길 샤함, 미도리, 초량 린, 슐로모 민츠, 사라 장, 로버트 맥더피, 나디아 살레르노 소넨버그, 앤 아키코 메이어즈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의 옛 제자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미스 딜레이' 선생님에 대해 한결같이 입을 모아 '최고라고 하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이들은 '놀랍다', '믿기 어려울 정도다', '환상적이다'와 같은 단어들로 자신들이 받았던 심오한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 체험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일일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로버트 맥더피(Robert Mcduffie)는 딜레이를 가리켜 '풀 서비스 선생님'이라 칭했는데 실제로 그녀는 학생들의 스승이자 코치이자 치료사이자 매니저의 역할까지 모두 담당했었다. 초량 린은 딜레이 교수의 레슨 시간이 마치 심리학자와의 상담 시간과도 같았다고 전한다. 레슨실에 들어가기 전에 온갖 고민들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딜레이 선생님과의 수업시간 후에는 그 고민들이 말끔히 해결되곤 했다고 한다. 

 

그녀의 레슨은 진지한 교습과 경력 상의 긴급한 계획들이 오가는 가운데 젊은이다운 즐거움이 넘쳤다. 그녀는 배우는 것과 연주하는 것은 재미가 있었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종종 학생이 뛰어난 연주를 들려줄 때면 그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한 기자가 그녀의 팔순 생일 때 은퇴를 고려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유감스럽게도 그만두기엔 이 일이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바이올린 선생을 천직으로 여긴 삶

도로시 딜레이와 줄리어드의 인연은 50년 이상이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당시의 줄리어드 교장 조지프 폴리시는 다음과 같이 그녀를 애도했다. 그녀는 수천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를 길러낸 지난 20세기 후반 최고의 바이올린 교수였으며 전 세계가 그녀의 존재를 따뜻한 인간미의 표상으로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라며 애도했다. 

 

1917년 미국 캔자스에서 출생한 도로시 딜레이는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세살 때 이미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그는 20세에 미시간 주립대를 졸업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30달러를 손에 쥔 채 장차 긴 세월 몸담게 될 줄리어드로 향하게 된다. 동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그녀는 독주자와 실내악 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졸업한 후 바이올리니스트로 계속 경력을 쌓아가던 그녀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줄리어드로 다시 숙명처럼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1946년 도로시 딜레이는 당시 막 줄리어드 교수로 임명된 이반 갈라미언(정경화 김영욱의 스승)의 지도를 받다가 2년 후에 그의 조교로 줄리어드 교수진에 합류하게 된다.

 

요아힘, 아우어, 이자이와 더불어 20세기 바이올린 연주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연주자이자 이작 펄만, 핀커스 주커만, 정경화, 김영욱, 하이메 라레도 같은 바이올리니스트를 길러낸 교수 갈라미언 밑에서 오랫동안 있었지만 딜레이의 교수법은 그와는 많이 달랐다. 

 

갈라미언은 모든 이들에게 적용하는 특정 체계를 적용했다면 딜레이는 보다 융통성이 있었다. 학생 개개인의 성격과 자라온 환경, 장단점을 많이 고려하는 교육 방식이었다. 러시아 태생의 갈라미언이 스파르타식의 맹렬한 연습과 피나는 노력을 강조했다면(정경화 선생님, 고생 많이 하셨겠다), 미국 태생의 딜레이는 포근한 모성애가 바탕에 깔려있었다는 것이 달랐다.

 

독자적인 교수법을 개발하면서 1970년 줄리어드 정교수에 취임한 그는 천재를 길러내는 최고의 교수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아이작 스턴도 생전에 딜레이 여사를 세계 최고의 바이올린 교수라고 극찬했으며 뉴욕타임스에서도 그를 가장 중요한 바이올린 지도자로 꼽았다. 이름만 들어도 설명이 필요없는 스타급 바이올리니스트 외에도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로열 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헤보우 등의 오케스트라 악장들을 지도했으며 유럽과 이스라엘, 일본, 중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열었고 한국에도 방문한 바 있다. 

 

김복수(전 KBS교향악단 콘서트마스터), 이성주(한예종 교수), 데이비드 김, 배은환, 배익환, 장민수(사라 장의 아버지), 최민재, 캐서린 조, 김지연, 이유라, 권윤경, 사라 장 등이 그녀의 한국인 제자들이다.

 

 

도로시 딜레이와 미도리
In 1986, Dorothy Delay and Midori at Aspen

 

아스펜에서의 여름학교

그녀의 여름 학교와 다름없는 아스펜 음악제에서는 줄리어드 학생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는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미도리와 사라 장도 줄리어드에 입학하기 전, 아스펜에서 딜레이와 첫 대면을 했다. 그밖에도 그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려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녀는 늘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했고 학생들에게는 아무리 작은 것도 칭찬해주는 마음 따뜻한 선생님이었다.

 

 

 

천재를 만들어내는 딜레이의 교수법

바이올린계의 대모로 일컬어질 정도로 공로를 인정받고 제자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은 그녀는 심리학을 공부한 교육자답게 학생들의 문제를 폭넓게 수용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실질적인 문제에 차근차근 접근했다.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개인의 개성이었다. 그 학생의 문화적, 음악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바이올린 교사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연주를 하건 이야기를 하건 간에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귀기울이는 그녀에게 학생들은 음악적인 문제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 대한 문제를 격의없이 털어놓고 의논했다. 

 

그녀의 레슨은 늘 활기가 넘쳤다. 한번 몰입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몰라 기다리는 학생의 줄이 레슨실 밖까지 이어졌다. '미스 딜레이'란 애칭 외에도 'Being Delayed'란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도로시 딜레이는 특정한 방식을 학생에게 주입하기보다는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존중해 주었으며 테크닉의 난점은 연주가 스스로 해결하도록 했다. 그래서 레슨은 그의 질문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 패시지에서 베토벤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은지, 보잉을 이렇게 다르게 해보면 어떨지, 여기서 내림활을 쓸 때 여유를 가지면 소리가 어떻게 날 것 같은지 다양한 관점에서 질문을 하여 학생과 함께 참여하고 생각하는 수업을 이끌었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도로시 딜레이
도로시 딜레이

 

그녀의 모든 제자는 나이에 상관없이 음계와 아르페지오, 에튀드, 바흐, 협주곡 등을 공부해야 했다. 그녀는 열살이 되기 전엔 하루 다섯 시간은 연습하길 바랐다. 하지만 연습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근본적인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한 인터뷰에서 바이올린 레슨에 있어 무엇에 치중하는가에 대해 그녀는 교사가 내려야 하는 가장 어려운 결정 중 하나는 어느 순간에 연습을 강요해야 할지, 방관해야 할지의 문제를 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생이 전적으로 개입해야 할 때가 있는 가 하면, 단순한 음향판 이상의 역할은 하지 말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도로시 딜레이는 그 역할을 기가 막히게 해낸 몇 안 되는 교사 중 한 명이었다.

 

심장이 없는 나무꾼과 머리가 없는 허수아비, 용기 없는 사자가 캔자스의 도로시와 함께 원하는 바를 모두 찾게 되는 오즈의 마법사란 동화를 알고 있을 것이다. 제자의 장점을 발굴해 키워주는 것, 스스로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녀의 교육 철학이었다. 세계 바이올린 교육계에 큰 자취를 남긴 최초의 여성이자 미국인인 도로시 딜레이. 학생과 음악을 향한 절대 명쾌한 그녀의 신념과 애정을 존경하며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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