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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공연 이야기

러시아 바이올린의 마지막 계승자, 네이선 밀슈타인

by 매들렌 2022.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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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을 든 나단 밀슈타인 사진
Nathan Mironovich Milstein, 1903.1.13-1992.12.21

 

 

러시아 바이올린의 마지막 계승자, 네이선 밀슈타인

어떤 음악가는 외롭고 고단한 삶을 뚫고서 자신의 예술혼을 펼치는가 하면, 어떤 음악가는 온유하고 행복한 모습으로 자신의 세계를 보여준다. 전자의 예가 니콜로 파가니니, 오토 클럼페러, 클라라 하스킬 같은 경우라면 후자의 예가 브루노 발터나 밀슈타인의 경우다. 어떤 이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재능을 불태우고 요절하지만 또 어떤 이는 오랜 세월을 통해 긴 그림자를 늘어뜨린다. 전자의 예가 모차르트 같은 경우라면 후자의 예가 밀슈타인의 경우다.

브루노 발터나 네이선 밀슈타인에 대해 행복했던 연주자라고 하는 것은 그의 인생에 굴곡이 없었다는 측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혁명 전에 태어나 혁명과 스탈린을 경험하고 서방으로 망명하여 세계 1, 2차 세계 대전을 겪고 그 와중에 부모와 형제들을 모두 잃은 사람에게는, 또는 그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겐 기본적으로 '행복'이라는 기준이 달라진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에게 '행복했던 연주자'라는 수식을 붙이는 이유는 그의 자족할 줄 아는 마음과 89년의 삶을 관통한 음악에 대한 사랑과 기품 때문이다. 

 

 

 

그가 걸어간 길

네이선(혹은 나단) 밀슈타인은 1903년 흑해 연안의 오데사에서 미론 밀슈타인과 마리아 밀슈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음악인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다섯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네이선은 유난히 개구쟁이 기질을 보이는 아이였다. 어머니 마리아는 장난꾸러기 아들이 바이올린을 시작하면 좀 얌전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일곱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게 했다. 

 

러시아 오데사 지방은 천재적인 음악가를 많이 배출한 고장으로 유명하다.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 슈라 체르카스키,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드 코간 그리고 데이비드 오이스트라흐 등이 모두 오데사 출신 음악가들이다. 네이선 밀슈타인은 코간과 오이스트라흐의 선생이기도 했던 오데사의 바이올리니스트 피요트르 스톨야르스키에게 배웠고, 1914년이 되자 이미 작곡가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이후 그는 상트페테르스부르크로 가서 러시아 바이올린 계의 대부 레오폴드 아우어의 제자가 되었다. 그 클래스엔 이미 야샤 하이페츠가 와 있었다. 처음 아우어의 클래스에 들어가서 바이올린을 켜니까 아우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학생들을 돌아보며 이 오데사의 테크닉이 어떠냐고 물었던 것이 생각난다고 그는 말했었다. 그는 또 그때 하이페츠나 다른 학생들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그 대답이 어쨌든 간에 이 놀라운 테크닉의 오데사 소년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에 관한 소문이 퍼지고 신문에 기사들이 등장하니까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관계자가 그와 마리아를 불렀다. 바로 유명한 글라주노프였다. 그의 초대로 레닌그라드 극장의 특별석에 앉아 오페라를 보게 되었는데 그 자리는 바로 차르가 앉는 자리였다고 한다. 당시의 러시아에서 차르는 살아 있는 신이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흥분했겠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레닌그라드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충격과 흥분으로 열흘 간이나 넋을 빼놓고 지냈다. 어린 나이로서는 견디기 벅찬 감정들이 그의 혼을 빼앗아 간 것이다. 

 

여행 전까지만 해도 밀슈타인은 바이올린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그는 음악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A young Nathan Milstein
네이선 밀슈테인의 젊은 날

 

그의 본격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연주 활동은 1920년 5월 16일 고향인 오데사에서 그 막을 올렸다. 여섯 번 연속인 바이올린 독주회가 그 시작이었다. 어느 날 키이우(키예프) 공연장에서 그는 한 피아니스트를 만나게 된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독주회 다음 날, 같이 차를 마시자며 호로비츠가 그를 초대했다. 호로비츠는 오페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는데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시리즈나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오페라에 대해 신나게 떠들곤 했다. 악보도 없이 그런 오페라들을 척척 피아노로 쳐내는 모습에 흠뻑 빠진 그는 3년 동안 호로비츠의 집에서 같이 살았다. 

 

평생 동안 지속된 그 둘의 우정은 그때부터 시작되었고 이 두 젊은이는 혁명으로 말미암아 신생 국가가 된 소비에트 연방의 순회 공연 길에 올랐다. 혁명 정부는 그들에게 <혁명의 젊은이들>이란 칭호를 주었고 이 덕분에 각 도시의 문화국에서 그들의 공연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1925년 소비에트 순회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혁명의 젊은이들>은 문화 사절의 자격으로 서방 세계에 나가게 되었다. 당시의 실권자인 트로츠키는 신생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이 문화적으로도 아주 높은 수준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고 두 사람은 난생 처음으로 파리 무대에 서게 되었다. 유럽에서 그들 듀오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얼마 후, 또 한 사람의 혁명의 젊은이가 도착했다. 그가 바로 첼리스트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였다. 유럽 음악계는 이 세 명의 러시아 젊은이에게 <3인의 척탄병>이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스탈린의 철권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미 서방의 자유를 알아버린 밀슈타인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조국을 떠난 그는 베를린에 짐을 풀었다. 이미 베를린에 와 있던 호로비츠와 재회하고 이어 피아티고르스키까지 가세하여 <3인의 척탄병>은 다시 트리오를 결성했다. 이후 1986년까지 호로비츠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밀슈타인은 평생 동안 한 번도 러시아에 들르지 않았다. 

 

밀슈타인&#44; 피아티고르스키 그리고 호로비츠
3인의 척탄병. 왼쪽부터 밀슈타인, 피아티고르스키 그리고 호로비츠

 

서방에서 호로비츠가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킨 데 비해, 검은 머리칼과 작은 체구를 가진 그는 그렇게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당시의 바이올린 계에는 크라이슬러가 아직 건재해 있었으며 미샤 엘만, 요제프 시게티, 자크 티보, 야샤 하이페츠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에 신동으로 소문난 예후디 메뉴인까지 가세했다. 근대적인 감성에 밀착한 밀슈타인의 바이올린은 너무 새롭게 들렸고 따라서 젊고 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평가 이상은 받지 못했다. 

 

1929년 10월 17일, 미국에서 지휘자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글라주노프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1930년 미국 시민권을 얻어 2차 세계 대전 후까지 미국에서 활동한 밀슈타인은 전쟁이 끝난 후 영국 런던에 정착했다. 이 시기까지의 밀슈타인은 하이페츠마저도 한 걸음 양보할 정도로 엄청난 기교파 연주자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영국으로 건너간 이후부터 그의 음악 세계는 변화를 거듭했다. 그는 바흐의 대가인 동시에 파가니니의 명수라는, 다시 말해 기교와 음악성이 겸비된 연주자로 떠올랐다.

 

1962년 2월 2일자 TIME 지는 당대 세계 5대 바이올리니스트를 선정하여 발표했다. 당시 거명된 다섯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야샤 하이페츠, 지노 프란체스카티, 데이비드 오이스트라흐, 아이작 스턴 그리고 네이선 밀슈타인이었다. 

 

1979년 11월, 76세의 그가 카네기 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줄리어드를 다니고 있던 어린 학생들부터 이작 펄만, 핀커스 주커만 같은 연주자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바이올리니스트는 모두 그의 연주회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당시 음악 비평가 해롤드 션버그는 연주회 평의 말미에, 밀슈타인의 황혼은 비록 고귀하긴 하지만 그 자체로 황금시대의 황혼을 말하는 것이었다고 썼다. 그가 말하는 황금시대는 뭐고 황혼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에 대해 해롤드 션버그는 1979년이 되자 그들 세대 중 무대에 오르는 유일한 바이올리니스트는 밀슈타인뿐이다. 하이페츠는 은퇴했고 미샤 엘먼, 토샤 샤이델, 에프렘 짐발리스트는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 밖에 모든 레오폴드 아우어의 제자들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기술했다. 그의 황혼은 20세기 제1세대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완벽한 퇴조를 알리는 종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83세 때의 연주회를 끝으로 왼손 부상으로 인해 무대에서 은퇴한 그는 바이올린 편곡과 교육에 매달리다가 1992년 12월 21일,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프랑스의 저명한 일간지인 <르 몽드>는 바이올린의 낭만적 전설이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라며 애도했다. 

 

 

 

 

가식 없던 열정

그는 확실히 야샤 하이페츠는 훨씬 더 눈부신 기교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런 평가가 옳건 그르건 간에 하이페츠는 차갑고 객관적인 예술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요제프 시게티의 경우는 훨씬 더 풍부한 음악성과 훨씬 더 넓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밀슈타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음색과 기술 그리고 총체적인 자질을 그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같은 아우어의 제자로서 3년 연상인 하이페츠와 그를 비교해 보면 그의 특징을 알 수 있다.

그는 하이페츠처럼 Best, Great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바이올린 학자 헨리 로스(Henry Roth)는 이 점에 대해, 하이페츠의 윤택한 톤과 몰아침은 그의 기질과 함께 대중적인 성공의 열쇠를 제공해 주었지만 이에 비해 밀슈타인은 그런 것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으며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자체 충족률을 갖춘 사람이었다.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았으며 항상 단정했다. 그의 친구나 그의 환경이나 그의 바이올린이나 그의 고상한 캐시미어 스웨터나 모든 것들이 그의 기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인 비극이나 고민과는 무관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고귀하고 거룩한 인내는 연주에서도 나타나 경외감을 자아냈다. 그리고 이 점은 하이페츠와 아주 다른 점이었다.

 

음악적인 면에서도 그는 어제와 오늘이 다른 사람이었고 레코드마다 다른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개발해 나가는 사람이었다. 이에 비해 하이페츠는 초기나 후기나 거의 변하지 않았고 변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 명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완성되려면 적어도 육칠십 년의 세월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대개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예순이나 늦어도 일흔이 되면 톤이 약해지고 긴장감을 잃게 마련인데 그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빛나고 향기롭고 풍부한 톤을 내면적으로 갖추어 나가면서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바이올린 연주 중인 나단 밀슈타인
Nathan Milstein (1903.1.13 - 1992.12.21)

 

 

그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다소 느리게 연주했는데 그렇다고 무기력에 빠지지는 않았고, 늘 유지되고 있던 점은 악기를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고정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예술가로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이다. 또한 그는 악기를 결코 강압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근육을 피곤하게 만드는 자세를 피했다. 그와 동시에 결코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서 항상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모험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말년에 뉴욕의 줄리어드에서 교편을 잡았고 스위스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다. 그의 수업은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하이페츠와는 많이 달랐다고 한다.  그의 교육 철학은 너무 많은 연습을 지양하는 것이었다. 많은 연습은 많은 아스피린을 복용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어린 연주자들에게 하루 대여섯 시간씩 연습시키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집중할 수 없다. 기교에 관한 것이라면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가 적당하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철학과 딱 맞아 떨어지는 연습 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사라 장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하루 세 시간 이상 연습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생각보다 적은 연습 시간에 과연 신동 출신 천재라서 그런가 보다 하였다. 어쩌면 그녀가 줄리어드에 다니던 어린 시절, 밀슈타인의 이런 연습 방식을 직접 들었거나 간접으로 들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네이선 밀슈타인은 독창적인 운지법과 연주법으로 유명했다.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2악장부터 운지법을 바꾸어 연주하여 악장들을 놀라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그는 미샤 엘만이 즐기던 빠른 비브라토를 피했고, 하이페츠 풍의 강렬한 피치카토도 싫어했다. 그는 손쉬운 감동을 유발하는 연주 방식을 채택하지는 않았다. 순수하고 부드러운 음을 좋아했다. 따라서 그의 연주는 완벽하지만 동시에 소박했다. 모든 것이 내면적으로 소화되어 우아한 자태를 지녔다. 지나친 기교성을 절제하고 음악의 실체에 집중함으로써 가식 없는 열정이라는 자신만의 특유한 방식을 발전시켰다. 

 

 

 

후배 연주자들에 대한 그의 생각 

기교적으로 뛰어난 소위 '천재'들이 매스컴에 떠오를 때마다 그는 천재 혹은 신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재라는 것은 두 가지 속성이 요구된다. 첫째, 감수성 높은 상상력을 지녀 자신이 연주하는 것에 대한 느낌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고 둘째, 완벽한 기교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연습할 수 있는 체력과 노력이다. 오늘날 화려한 기교를 가진 연주자는 많지만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연주자는 부족하다. 이것은 곧 그들의 기교가 최상의 것이 못 된다는 말과 같다. 해석할 수 있는 자가 기교가 뛰어난 자보다 훨씬 천재에 가깝다. 모든 예술이 다 마찬가지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보면 그의 기교는 별로다. 그러나 모든 힘찬 브러시가 그 의미를 붙잡고 있다. 재능의 부족에도 그의 작품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한 가지 더 덧붙였다. 「요즘 연주자들은 어쨌든 연주는 참 잘한다. 하지만 연구는 거의 하지 않는다. 금전의 매력 때문이라고 본다. 특히 일주일에 150회의 연주회를 갖는 젊은 연주자는 몇 년 후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청중들에게 나의 연주를 통해 내가 좋은 음악가라는 것을 납득시킬 수 없다면 거기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을까.」 

 

노년의 나단 밀슈타인
Nathan Mil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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