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효명세자가 창작한 춤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이었던 효명세자. 총명하고 예술적인 재능도 남달랐던 그는 부왕 순조의 사랑을 받았으나 나이 스물둘에 결핵에 걸려 사망하고야 만다. 그가 그대로 왕위를 이어받아 왕이 되었더라면 조선 왕조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상상해본다. 문학적 재능도 남달라서 할아버지 정조 대왕보다 두 배나 많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 춤과 노래에도 안목이 빼어나 조선 후기 궁중무용의 황금기를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대리청정 기간 3년 동안 크고 작은 궁중 연회를 주최하면서 악사이며 무용가로 궁중에 상주한 김창하와 함께 새로운 궁중무용과 시를 만들어 예술로 왕실의 위엄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전승되어 온 조선시대 궁중음악과 무용 작품의 상당수가 효명세자가 작사, 작곡, 안무한 작품인 것이 많다. 백성과 함께 예술을 나누고자 하는 애민(愛民)의 마음도 실었기 때문에 그 수가 많은 것이 아닐까 싶다. 춘앵무는 궁중무용 중에서 유일하게 무용수 혼자 추는 춤이다.
이름만으로도 봄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춤
춘앵무의 이름은 봄을 뜻하는 한자, 춘(春)과 꾀꼬리 앵(鶯) 자로 '봄날의 꾀꼬리'라는 뜻이다. 끝에 춤출 무(舞)가 있으니 봄에 꾀꼬리가 추는 춤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앙증맞은 이름이 아닐 수 없다. 효명세자가 어머니 순원왕후의 나이 마흔 살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한 춤이다. 효심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효명세자의 따뜻한 마음이 봄처럼 따뜻하게 녹아있는 춤이기도 하다.
춘앵무의 의상
춘앵무는 무대 구성에서도 포근하고 밝은 색감의 봄을 찾아볼 수 있다. 화문석 위에서 홀로 춤을 추는 여기(여자 무용수)는 노란 앵삼을 걸치고 허리에는 빨간색 허리띠를 두르며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초록색의 하피(霞被, 왕후가 적의를 입을 때 어깨의 앞뒤로 늘어뜨리던 띠)를 양어깨에 내려 뜨려 아름다움을 더한다. 거기에 오색의 한삼을 손에 끼운 채 춤을 춘다. 이 춤은 탐스러운 노란색의 깃털을 자랑하는 꾀꼬리가 연녹색의 버드나무를 날아다니며 노니는 동작을 담고 있다. 앵무새와 버드나무를 상징하는 노란 앵삼에 초록색 하피를 둘러 봄의 기운을 한층 더한다. 춘앵무를 출 때 신는 신발은 궁중 무용에서 주로 착용하는 붉은 신, 홍혜(紅鞋) 대신에 초록 신을 신는다. 계절감을 더하는 요소는 이것만이 아니다. 이 춤의 반주음악은 유초신지곡(柳初新之曲)으로 버들잎이 새로이 처음 싹튼다라는 뜻을 갖는데 음악에서도 파릇파릇한 춘사월을 느낄 수가 있다.
춘앵무의 구성
이 작품은 효명세자(익종)가 직접 지은 창가(唱歌)로 시작된다. 무대에 단독으로 오른 여기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무대 뒤편 중앙에 선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을 올려 입을 가리고는 이내 창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 후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겨, 무대인 화문석 가운데로 걸어 나온다. 여기는 치맛자락을 끌며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사선으로 걸음을 옮기는 사예거와 발꿈치를 좌우 번갈아 드는 비리, 한 계단씩 탑을 오른다는 뜻의 탑탑고, 그리고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듯 팔을 뒤로 여며 무릎을 굽히는 동작의 풍류지를 선보인다. 이처럼 춘앵무를 구성하는 동작은 천천히 흐르는 물처럼 한없이 고요하고 우아하다. 그리고 춤사위 하나하나가 봄의 색을 갖추어 곱디곱다. 마치 춘앵무라는 춤 자체가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주 천천히 우아하게 추는 춤
효명세자는 아버지 순조의 명을 받들어 세자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대리청정을 하였다.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한편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궁중연회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사실 일찍부터 예절, 효와 충 사상만큼 음악과 무용 같은 예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절이 세상의 질서를 표현한다면 예술은 세상의 조화로움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 최고의 성군인 세종도 조선만의 음악과 악기를 정비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하지만 왜란을 겪은 조선 후기에 와서는 예술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안동 김씨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해 임금이 구상한 데로 국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효명세자는 백성들에게 왕실이 나서서 음악과 춤으로 어른들께 효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서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고, 동시에 안동 김 씨가 권력을 독차지하고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해주려고 했다. 아무튼 춘앵무는 아주 천천히 느리게 추기 때문에 어려워 보이지 않지만 사실 전통 춤 중에서 가장 복잡한 춤으로 손꼽힌다.
개인적인 생각
몇 년 전 우연히 교육방송을 보다가 거기서 춘앵무를 보았다. 요즘처럼 빨리빨리 세상에서 아주 느리게 추는 전통 춤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기도 했지만 무용수가 입은 궁중 한복이 너무 고와서 1분 볼 것을 10분이나 보고 앉아 있었다. 그떄는 그 춤이 춘앵무 인지도 몰랐다. 얼마 전 궁중무용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의상을 보고 그때 그것이 춘앵무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느려서 지루할지는 몰라도 의상은 너무 우아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아까운 인물이었던 효명세자의 작품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서 감상한다면 그리 지루하지만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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