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고국 무대에 서는 정명훈 마에스트로
KBS교향악단의 올해 마지막 정기연주회의 지휘자가 예술감독 취임을 앞둔 피에타리 잉키넨에서 정명훈으로 급작스럽게 교체되었다. KBS교향악단은 최근 내놓은 보도자료에서 '내년 1월에 KBS교향악단 예술감독으로 취임 예정인 피에타리 잉키넨(Pietari Inkinen) 씨가 코로나19 확산으로 내한하기가 어려워져서 마침 국내에 체류중이었던 정명훈 씨가 급하게 구원 투수로 나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예정되어 있던 프로그램의 레퍼토리가 수정되었다. 원래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들려줄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명훈 씨로 바뀌면서 '핀란디아'는 취소가 되었고 베토벤 교향곡 9번인 '합창'만 연주하기로 했다.
세상을 향한 인류의 메아리
교향곡 9번 '합창'은 베토벤이 작곡한 9개의 교향곡 중 가장 마지막으로 작곡된 교향곡이다. 베토벤이 작곡한 모든 작품 뿐만 아니라 인류가 남긴 음악 작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는다. 특히 4악장의 합창단과 함께 하는 선율은 잊을 수 없는 감동과 환희를 청중들에게 안겨준다. '환희의 송가'라고도 불리는 이 4악장 덕분에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세상을 향한 인류의 메아리로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영원히 남게 되었다.
교향곡 9번 D(라)단조, 작품번호(Opus) 125는 1824년에 루드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쓴 작품이다. 자신이 직접 '합창'이라는 부제목을 붙이진 않았으나 인간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는 유일한 교향곡이기에 후대 사람들이 부제목으로 그렇게 붙여준 것이다. 이 작품의 가장 유명하고 전설로 남은 연주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린 1951년 7월에 열린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푸르트벵글러(Furtwangler, 1886-1954) 지휘의 바이로이트 교향악단의 연주가 남아있다. 이것은 인류의 전쟁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전쟁을 겪은 후라 그 당시 실제 들었던 청중들은 모두 소리없이 흐느꼈다고 한다. 이날 연주는 음반으로도 나와있다.
각국 송년음악회 단골 메뉴가 된 '합창'교향곡
언제부턴가 이 곡이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송년음악회 혹은 12월 정기연주회의 단골 연주곡으로 공연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러한 사례는 거의 없다. 기껏해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Leipzig Gewandhaus Orchestra) 정도가 매년 주기로 공연할 뿐이다. 원래 이런 관습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12월 31일 오후 11시에 독일 노동자들의 음악 운동을 주최하는 측에서 이 곡을 라이프치히에서 연주한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전쟁의 종료와 왕정의 종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지역 언론은 '우리는 여전히 가난하고 혼란 속에서 살지만, 11월 혁명에 위안을 삼는 이들에게 이 환희의 송가는 심금을 울릴 것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이들을 감동시킬만한 음악이다. 우리는 전에 그 어느때보다 사회를 선의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논평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례가 정착된 것은 일본에서다. 1940년 12월 31일, 일본서기라는 역사책에 따르면 일본 기원 2600년 기념 행사로 신교향악단이 당시 전임 지휘자였던 조지프 로젠스톡의 지휘로 이 곡을 연주했고 이 실황은 JOAK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다. JOAK의 직원이었던 미야케 젠조는 '독일에서는 12월 31일에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하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있다'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말고는 그러지 않았기에 그가 오해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을 빛낸 음악가, 마에스트로 정명훈
지휘자 정명훈 씨는 1953년 1월 22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첼리스트 정명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하여 음반 녹음 및 공연을 하기도 했다. 7남매 중 여섯 째로 태어나 서울 덕수초등학교를 다녔다. 일찍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여 배운지 3년 째인 일곱살 때, 서울 시립 교향악단과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하여 대단한 화제를 모았다. 1961년에 가족 모두가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로 이주했다. 14세 때 첫 개인 독주회를 개최한 그는 연주 도중 곡을 잊어버리는 실수를 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반복해서 연주한 끝에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 그의 개인 레슨 스승이었던 제이콥슨 여사는 그에게 '네가 완벽한 연주를 하는 것보다 실수를 하더라도 감동적인 연주를 하기 바란다.'라고 격려해주었다.
1968년 미국 뉴욕의 메네스 음악원에 입학하여 나디아 라이젠버그와 칼 밤베르거에게 각각 피아노와 지휘를 배웠다. 그리고 마침내 1974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피아니스트로 참가해 1위 없는 2위로 입상해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그가 미국 시민권자임에도 불구하고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이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로부터 청와대 만찬까지 초대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줄리어드 재학 중이던 1976년에 뉴욕 청소년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지휘자로 공식 데뷔하였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Carlo Maria Giulini)의 부지휘자로 전문 관현악단을 지휘하는 경험을 쌓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지휘자로서 유명세를 탄 것은 1989년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 오페라단(현재 파리 국립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부터다. 그곳에서 숱한 음반 녹음과 개최된 공연은 모두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1994년, 새로 부임한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음악 감독 직책에서 해임되었고 이는 프랑스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기도 했다. 솔직히 나도 이 때 그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80년 세대라서 그와 정트리오를 그 전에는 알 수가 없었다. 1995년 유네스코 서울 지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이었고,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97년에는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국립 음악원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계약도 이 때 체결하였다. 1998년에는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부임했었고 2000년에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 도쿄 필하모닉 관현악단의 특별 예술 고문으로 초청되기도 했다.
2005년에는 서울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어 활동했고 2012년부터는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Staatskapelle Dresden)의 역사상 첫 번째 수석 객원지휘자로 임명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베를린 필하모니커, 로열 콘서트헤보우 관현악단, 런던 심포니, 시카고 심포니,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빈 필하모닉,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 뮌헨 필하모닉 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세계 각국의 주요한 관현악단과 오페라 극장들을 객원 지휘하고 있으며 다수의 영상물과 음반들을 남기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고국에서의 지휘 모습이 무척 그리워진다. 라디오 방송인 KBS 1FM FM실황음악 으로 그의 지휘봉에서 빚어지는 관현악단의 소리라도 감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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