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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공연 이야기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의 생애

by 매들렌 2022.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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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ra Haskil's photo
Clara Haskil, 1895.1.7 - 1960.12.7

 

신이 질투한 미모의 천재 소녀 

1895년 클라라 하스킬은 루마니아의 부카레스트에서 태어났다. 스페인계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세 명의 딸 중 두 번째였다. 언니 릴리는 피아노를 배웠고 동생 안느는 바이올린을 배웠다. 클라라는 처음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같이 배웠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음악 가정인 셈이었다. 비록 네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마치 모차르트를 연상하게 만든다. 아직 여섯 살이던 때 그녀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의 한 악장을 단 한번 듣고서 그 자리에서 그대로 따라 쳤다. 악보를 전혀 볼 줄 몰랐던 때였다. 거기다 그 악장 전체를 다른 조로 바꾸어서 치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브람스와 요아힘의 친구였던 안톤 도어에게 자신의 연주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도어는 그녀의 연주를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기적이다>. 1906년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가브리엘 포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1907년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3개월이 지나자 그는 더 이상 가르쳐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열 다섯 살 되던 1910년에 파리 콘서바토리를 졸업했다. 졸업할 때 그녀는 최고상을 받았고 이때부터 그녀의 연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시절 아직 어린 소녀였던 클라라 하스킬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음악에 대한 천재적인 직관력과 어딘가 신비로움을 주는 몽환적인 미모를 겸비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신은 그 두 가지 모두를 갖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머리카락 한 올 차이

비극은 곧바로 찾아왔다. 그녀가 연주 여행으로 미국으로 떠나려 할 때쯤인 열여덟 살의 나이에 전쟁과 함께 첫 시련이 다가왔다. <세포 경화증>이라는, 뼈와 근육이 붙거나 세포끼리 붙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불치병에 걸린 것이다. 이후 4년에 걸쳐 그녀는 몸에 깁스를 댄 채 살아야 했다. 1913년부터 1921년까지 연주회를 가질 수 없었으니 무려 8년간의 공백을 가져야 했다. 연주자에게 8년의 공백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보다 더 끔찍했던 시련은 이 병의 후유증이었다. 젊은 시절의 신비로웠던 미모는 이 병의 후유증으로 인해 하얀 백발로 만들어버렸고 늘 곧게 뻗어있던 그녀의 등을 곱추로 만들어버렸다. 상상해보라! 어느 날 갑자기 백발의 꼽추로 변해버린 이십 대의 아가씨를, 그 후로 평생 그 모습을 지녀야 했던 한 여인을 말이다.

 

클라라 하스킬이 피아노를 치는 사진
클라라 하스킬

 

 

 

예기치 않은 몹쓸 병으로 인해 그녀의 아름다웠던 미모는 사라졌지만 그녀의 천재적인 음악성은 오히려 더욱 또렷해졌다. 1924년부터 연주 활동을 재개한 그녀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콘서트를 가졌고 1926년 영국에서도 첫 콘서트를 열었다. 1927년 파리에서 이자이와 함께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연주회는 그녀의 인기를 회복시켰으며 1949년까지 주로 파리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이번엔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유대인이었던 그녀는 즉시 남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피신했다. (영화 피아니스트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극도의 공포와 피곤으로 뇌졸중을 일으켰다. 실명의 위기에 부닥쳤으며 각종 신경계에도 종양이 생겨 긴급 수술을 받지 않으면 살아나기 힘든 지경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유명한 유대계 의사가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달려왔고 어려운 수술을 통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클라라 하스킬은 늘 자신의 목숨을 놓고 비유했던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다시 벼랑 끝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까지 약 2년 동안 그녀는 마르세유 근교에 숨어지내야 했다. 당시 그녀가 가진 것은 바이올린 한 대와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9년에 스위스로 망명한 그녀는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여 활동하다가 1960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타계했다. 1963년에 그녀를 기념하기 위해 클라라 하스킬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창설되었다.

 

 

 

오늘도 집행 유예가 내려졌군요

클라라 하스킬은 항상 그날의 연주가 생의 마지막 연주라고 생각했다. 병약했던 자신의 몸 상태를 떠올려보면 농담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연주회가 끝나면 그녀는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도 집행 유예가 내려졌군요>. 

 

그녀는 성격 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무엇을 과장하거나 밖으로 발산하는 타입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니 연주 중에 음악적인 쇼맨십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항상 말이 없고 수줍어했다. 그녀의 미국 매니저는 '만약 그녀에게 재능이 좀 더 부족했더라면 오히려 훨씬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이러니컬한 말을 했더랬다.  그녀는 항상 고독했다. 그녀의 일생은 고독한 동시에 위험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고독 속에 침잠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병약한 그녀는 매일 매일 연습할 처지도 못 되었다. 소심하고 수줍은 성격 때문에 많은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배우는 형편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렇다 할 스승도 얻지 못했다. 코르토에게 배운 적이 있으나 당시의 그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였다. 결국 그녀에겐 타고난 천재성과 영혼의 세계가 있을 뿐이었고 그녀는 스스로 이 영혼의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까다로운 고독주의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와 관계해봤던 모든 음악가들이 그녀에 대해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었다>라고 증언한다. 겸손이 지나쳐 항상 자신의 연주가 부족하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타고난 성격과 병과 전쟁 때문에 그녀가 그나마 꾸준한 연주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였다. 1950년대의 십 여 년이 그녀의 주요 활동기였다. 이 기간 동안 그녀에게는 신으로부터 수많은 집행 유예가 내려져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피에르 몽퇴,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세르주 첼리비다케, 라파엘 쿠벨릭,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 기라성 같은 지휘자들과 협연했다. 또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투르 그뤼미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등과도 연주와 음반 녹음을 했고 지금까지도 꼭 들어야 할 명음반으로 남아있다. 

 

이때쯤 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겠다며 어안이 벙벙해 했다. 지금 자신의 연주가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제 와서 사람들이 자신의 연주를 듣겠다고 여기저기서 불러대니 기쁘기도 하고 감사해했다.

 

클라라 하스킬의 초년 모습과 말년 모습 사진들
(왼) 병에 걸리기 전의 클라라 하스킬, (오) 후유증을 안고 활동하던 시절

 

 

한없이 투명한 모차르트

클라라 하스킬의 천재적 직관력과 기억력은 나이가 들어서도 후퇴하는 일이 없었다. 몇 가지 기록을 찾아보면, 1937년 그녀의 나이 마흔두 살 때 갑자기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곡을 이틀 만에 완전히 암기해버렸다. 또 한 번은 스위스에서 연주하기로 했던 호로비츠가 제때 도착하지 못해서 대타로 협연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말 그대로 한나절 만에 암기해 버렸다. 협주곡 완주 시간이 보통 30여 분 된다고 봤을 때 그녀의 암기력은 엄청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피아노 파트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총보를 포함한 곡 전체를 외워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녀와 같이 연주했던 동료들은 그녀의 손가락이 엄청나게 길고 넓게 벌어졌다는 말을 전한다. 그녀가 손을 펼치면 부채가 펴진 모양이 되었으며, 새끼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이 손목에 직접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전 세계 수많은 음악 팬들에게 클라라는 무엇보다도 '모차르트 연주가'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콘서트 기록을 살펴보면 그녀의 레퍼토리가 생각보다 넓고 다채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초기 레퍼토리에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그리고 생상 피아노 협주곡 5번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많은 음악가와 평론가들이 그녀의 모차르트에 대해 찬양했다. 같은 루마니아 출신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는 그녀의 모차르트 연주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진실에 가까운 모차르트'라고 찬탄했다.  우리나라 음반 비평가인 안동림 교수는 '천의무봉'이라는 말로 이를 표현했다. 

 

어떠한 꾸밈도 과장도 없이 다만 마음을 넣어 음을 굴리는 것만으로 듣는 이의 가슴에 파고드는 감동을 느끼게 해준 것이 바로 그녀의 모차르트다. 그러나 그녀의 모차르트에 대한 감상은 늘 언어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 아름다움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말년의 클라라 하스킬
고양이와 함께 한 말년의 클라라 하스킬

 

그녀가 남긴 음반 중에서 그녀의 아들 뻘 되는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투르 그뤼미오와 함께 연주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음반은 그녀의 모차르트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그뤼미오를 다독거리며 엮어가는 청명하고 슬픈 우수는 들을수록 새롭게 들린다.

 

 

 

그녀의 최후

1960년 여름에 가진 파리 연주회에서 심장 장애를 일으킨 이후로 클라라 하스킬은 죽음을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그녀는 거의 평생을 연주 중에 자신의 생이 끝날 것이라는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그녀는 파리에서 그뤼미오와 함께 연주회를 가진 후, 다음 공연을 위해 기차로 브뤼셀에 갔다. 역의 계단을 내려오던 그녀는 순간 현기증을 일으켜 계단으로 굴러 떨어졌다. 의식 불명 상태로 실려간 그녀는 병원에서 잠시 의식이 돌아왔으나 도저히 내일 있을 연주회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클라라는 파리에서 달려온 동생 안느에게 내일 공연은 힘들 것 같으니 그뤼미오 씨에게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고 말한다. 그것이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그녀는 예순여섯 살 생일을 한 달 남겨놓은 1960년 12월 7일 이른 아침에 모차르트가 가 있는 곳으로 영원히 떠났다. 

 

 

클라라 하스킬의 생일 추모
1895년 1월 7일 생

 

나의 생각

살아 계셨다면 지금은 127세쯤 되겠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훌쩍 넘어버리는 나이라서 금새 생각을 접었지만 1960년에 돌아가셨다니 좀 일찍 가신 것이 아닐까. 그것이 조금 아쉽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녀의 음반은 그뤼미오와 함께 연주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음반뿐이다. 음반 속 그녀의 피아노 소리는 그저 단순히 바이올린을 반주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어우러져 영롱한 소리를 내고 있다. 투명한 연주라는 수식어가 참 어울리는 연주 음반이다. 오랜만에 그녀의 음반을 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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