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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공연 이야기

한국 창작 무용의 선구자 최승희 (feat. 친일예술가)

by 매들렌 2022.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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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최승희 사진
최승희(1911-1967. 69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음)

 

한국 창작 무용의 선구자 최승희. 동양의 이사도라 덩컨이라고 불릴만하며 한국 전통무용을 무대 예술화한 최초의 예인이다. 그녀는 아버지 최준현의 2남 2녀 중 막내딸로 서울에서 태어나 처음엔 음악 교사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큰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이시이 바쿠(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의 공연을 보고 무용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소학교를 4년 월반하여 졸업할 만큼 총명했다고 한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이시이 바쿠의 제자로 들어갔고 곧 두각을 나타내어 그의 무용단에서 최고의 무용수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시이 무용단 1급 무용수 자리로 만족하지 못했다.

큰 꿈을 품고 조국으로 돌아오다

이시이 바쿠 무용단에서 3년간 무용수로 활약한 그녀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안무를 창작하기 위해 독립했다. 당시 무용에 한하여 불모지였던 고국으로 돌아와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세웠다. 하지만 사람들의 무용에 대한 인식 부족과 심각한 재정난으로 인해 다시 이시이 바쿠 무용단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시이 바쿠는 그때 한국의 전통 무용을 배우라고 권했고 최승희는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는지 자신만의 전통 무용을 창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때까지도 기생(妓生) 집에서나 추던 한국 전통 무용을 무대를 통한 공연 예술로써 승화시켰다.

최승희의 공연 작품 사진
(왼쪽부터) 장고춤, 무당춤, 초립동

 

처음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1930.2.1), 최승희 무용 발표회를 열어 프로 무용가로서 자신의 무대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1930년대 창작한 무용으로는 검무, 승무, 무당춤 그리고 장고춤이 있다.

최승희의 작품 검무
검무(1930년대)

 

최승희의 승무
조지훈 시 '승무'의 모티프가 된 승무


이후 다양한 한국 전통 무용을 섭렵했으며 전통적인 요소와 서구적인 요소를 결합해 새로운 한국 무용을 재창조했다. 최승희의 춤사위는 역동적이었고 주제에 따라 서정적이거나 해학적인 동작을 취해 우리나라의 정서와 문화를 잘 표현해냈다고 한다.

세계를 매혹시킨 그녀의 춤

이시이 바쿠에게서 독립한 최승희는 전 세계적으로 활동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뉴욕 등에서도 공연을 했고 유럽으로도 건너가 파리, 벨기에,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등지에서 열렬한 찬사를 받으며 성황리에 모든 공연을 마쳤다. 피카소와 장 콕도, 로망 롤랑 등 문화 예술계 유명인들도 최승희 무대를 감상했다. 이후 남미와 중국에서도 몇 차례 공연을 열었으며 최승희의 무용 예술에 감탄했다.

그녀는 자신이 안무한 한국 무용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스트라빈스키, R.쉬트라우스,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당시 이름난 예술가들을 모두 매혹시켰다. 1938년, 프랑스 파리의 두 번째로 큰 살레 플레엘 극장에서 '초립동' 춤을 춘 후 일주일 만에 파리 전체에 초립동 춤에 썼던 모자가 유행처럼 퍼졌다고 한다. 킹덤으로 인기를 끌었던 갓처럼 말이다. 그보다 더 전인 1934년에는 일본에서 무용 발표회를 열었을 때 저명한 작가였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최고의 무용가가 탄생했다'며 절찬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르 피가로>지는 그녀에 대해 '선이 매우 환상적인 동양 최고의 무희'라고 격찬을 보냈다.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중남미까지 그녀의 이름이 알려졌다. 1938년에 열린 세계 무용대회에서는 마리 비그만(Mari Wigman)과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 등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위촉될 정도였다.

그녀의 예술 세계

최승희는 어떻게 세계를 매혹시켰을까. 사람들의 그녀의 선천적으로 타고난 우아한 기품과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흠뻑 빠졌다고 한다. 뛰어난 신체조건도 한 몫 했다. 그녀는 당시 여성의 평균 키를 훌쩍 넘은 170cm였다. 게다가 호리호리한 체형이 아닌 살집과 근육이 적당히 잡혀 있는 균형 있고 건강한 체형이었다. 또한 동양인이지만 이목구비가 또렷한 서구형 미인이었다.

최승희의 전성기 모습
전성기 때 최승희

 

무용가로서 그녀는 표현력이 특히 좋았다. 위에 서술한 외형적인 조건 외에도 무용가로서 좋은 표현력을 가진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스스로 안무를 짜는 능력도 좋았다. 그녀가 추는 춤은 모두 그녀 스스로가 창작했다고 한다. 그녀는 주제에 따른 핵심적인 동작은 그대로 따르되 나머지 춤은 즉흥적으로 추었다. 팔짓, 어깻짓, 허리 놀림으로 무대를 꽉 차게 했다가 물 흐르듯 부드러운 몸짓을 취하기도 하고 역동적인 동작을 추가해 관객들의 시선이 온전히 자신에게 꽂히도록 했다. 그녀는 다양한 표정 연기도 일품이었다. 특히 사람들은 그녀의 눈에 매료되었다. 그녀의 눈빛은 굉장히 영롱했으며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최승희의 춤은 육체적인 춤이 아니라 눈으로 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무용수로서 무대 위에서 직접 그 아름다움을 구현해냈다는데 그녀가 춤추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하나도 없는 것이 참 아쉽다.


그녀의 친일 행적

하지만 식민지 조국의 현실은 무용가인 그녀에게도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게 된다. 일본의 강요로 만주와 중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막사마다 찾아다니며 위문공연에 투입되었다. 그녀는 관동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끌려가 공연을 해야했다. 이러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녀의 남은 삶에 큰 오점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서울에서 열린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위원회가 발족되고 친일파로 몰린 그녀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외에서건 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그녀는 현재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친일 예술가다. 이것에 대해 무용계를 포함한 예술계에서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녀가 처한 상황을 좀 더 다각적으로 살펴보고 판단해야 하는데 일본 관동군 위문공연을 하고 다녔다고 친일파에 등재되는 것이 온당한가 라는 의견을 내비친다. 하지만 이런 의견에는 커다란 논리의 허점이 생긴다. 살기 위해서 한 일이라는 건데 솔직히 거의 모든 친일파들이 하는 변명이 그렇다.
그러니 그런 논리라면 모든 친일파들도 용서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춤추는 예술가로서 한국 무용을 알렸다고 그녀만 봐줘야 한다는 논리야말로 온당하지 못하다. 그렇지 아니한가.

나 개인적으로는 그녀를 친일인명사전에 등록한 것은 옳은 일이라고 본다.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업적은 당연히 칭송할 만 하다. 하지만 친일 행위는 인간적인 이해는 할 수 있어도 공적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나를 분노하게 하는 건 그녀가 위문 공연을 다녔던 관동 지역 일본군 막사에는 어김없이 위안부들이 기거하는 위안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조선의 딸들이 일본군의 성욕 배출 도구로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사는 곳에서 일본 군인들을 위해 전통 무용을 추고 다녔다니, 이것이 민족의 정신을 북돋우려는 행위인가?

물론 살기 위해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을 당시의 상황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군 위문공연을 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왜 망명을 하지 않았을까.

못 한 것일까 안 한 것일까. 그녀의 국외 인맥으로나 재산으로나 맘만 먹으면 바다를 건너 망명도 가능했을 텐데 시도해봤다는 자료는 없다. 외국으로 공연 다닐 때 한복을 입었고 자신을 조선인이라고 칭했다는 그런 기사들이 요즘 자주 보인다. 어떻게든 그녀를 친일인명사전에서 빼내려고 하는 수작 이다. 한 마디로, 개가 웃을 일이다.


그녀의 최후


남한에서 친일파로 몰자 이곳에선 살 수 없다고 판단했던지, 그녀는 남편이 먼저 들어가 있던 평양으로 가버렸다. 그녀의 남편 안막은 좌파 문필가 겸 비평가로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곳에서의 삶은 얼마동안 괜찮았던 모양이다. 남편은 김일성 정부의 문화부 차관(우리나라로 치면)이라는 감투를 쓰고 살았고 그녀 또한 후학들을 양성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불행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1950년대 후반쯤, 북한에 불어닥친 정치적 숙청의 피바람이 시작되었고 그때 남편 안막은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걸로 보여진다. 그 와중에도 그녀만은 어떻게든 살아남은 모양이었지만, 1960년대 예술을 체제 선전도구로 이용하려는 정권에 반대하다가 그녀 또한 최후를 맞게 된다.

중년의 최승희 사진
중년의 최승희


나는 그녀 또한 한반도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봤다. 뛰어난 예술가가 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끼여 다른 나라 사람이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숱하게 겪었다. 그래서 안타깝다.

근래 들어 그녀를 연구하는 단체도 사람도 많아졌고 사진전도 자주 열린다. 코로나19 때문에 잠시 주춤하지만 말이다. 한국 창작 무용에서 그녀는 과히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것까지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니 그 업적을 알리고 칭송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녀를 친일인명사전에서 빼내려는 여론몰이 같은 짓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업적은 업적으로, 과오는 과오대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업적이 훌륭하니 과오는 덮어두자는 어리석은 짓은 그만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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