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그는 누구인가
돌아가신 지 2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호불호가 갈리는 분이다. 세계인들에게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있지만 모국인 한국인들한테는 혹독한 비난을 받아야 했던 비운의 음악가. 그 비운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전 세계에 있는 음대 작곡과에서는 그의 작품을 필수 교육과정 중 하나로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tvN에서 방영한 한 예능 프로에서 대중음악 작곡가이자 방송인인 유희열 씨도 서울대 작곡과를 다녔던 때 그의 작곡법을 중요하게 배웠다고 고백한 바 있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독일 베를린 음대 작곡과를 비롯하여 미국 줄리어드, 메네스, 커티스 등 내로라하는 세계의 유명 음대 작곡과에서는 필수로 수강해야 하는 중요한 작곡가이다. 방송에서 유희열 씨는 훗날 모차르트 베토벤 급으로 추앙받을 만한 작곡가라고까지 했다. 그가 해외에서 칭송받는 이유는 동서양의 기법을 모두 받아들여 현대적 모습으로 재창조했기 때문인데 쉽게 말하자면 그는 서양악기로 동양의 음악을 표현하려고 했고 그것은 서양인(특히 유럽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오케스트라가 우리의 종묘제례악을 연주한다고 상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파란 많은 그의 일생
나는 그의 작품을 소개하려고 하는 것이지 정치적으로 그가 어떻고 무엇이 잘못 됐는지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남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동백림 납치 사건을 얘기하지 않고는 그 사건 이후의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할 수가 없다. 백림은 베를린의 한자 음역으로서 동백림은 통일 전의 동베를린을 뜻한다.
작곡에의 영감을 얻기 위해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려 북한을 간 것이 당시 반공을 국책으로 삼던 서슬 퍼런 박정희 정부한테 제대로 찍히게 된다.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납치되었고 다른 독일 주요 교포 인사들과 함께 모진 고문을 당한 뒤 북한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불법 재판의 최종 결과를 말하자면 2심과 3심을 거쳐 간첩 혐의는 무죄로 판결 나고 국가보안법 위반(동조죄 및 탈출죄)으로 징역 10년형으로 확정되었다. 하지만 수갑 중 동백림 사건의 불법적인 체포 과정과 국제 사회의 여론 악화 등으로 인해 1969년 3월 29일 한국 정부가 형 집행 정지를 결정, 서독으로 돌아갔고 1970년 815 특사로 잔형이 면제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을 작곡했고 악보가 독일로 보내져 초연되면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그후 구명 운동을 위한 국제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슈톡하우젠, 게오르그 솔티, 지그프리트 팔름, 레너드 번스타인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기라성 같은 음악가들이 한국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으며 특히 서독과 동독의 유력 언론들은 더욱 열렬히 그를 옹호하며 적극적으로 구명운동을 펼쳤다. 이는 작곡 흉내나 내는 반동분자 나부랭이로만 알고 있던 박정희 정부를 크게 당황시켰고 외교적으로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왔다. 서독으로 외화 벌어오라고 광부와 간호사들을 대거 보낸 박정희 정부로서는 서독과 동독이 쌍으로 윤이상의 구명 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결국 형 집행정지로 1969년 3월 29일 풀려났고 그 이듬해인 1970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박정희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독일로 출국 후 사망할 때까지 조국 대한민국에 살아서는 오지 않았다. 조국이 못 오게 막은 탓도 있다.
그는 1971년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다. 조국 대한민국보다 그의 재능을 알아주고 사랑해준 서독 정부가 그와 그의 가족 모두를 국적 변경하도록 승인해주었다. 독일은 미국과 같은 이민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당시 외국인, 특히 동양인이 독일인과 결혼 없이 독일 국적을 취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서독 정부가 윤이상의 예술적인 입지와 위상을 인정한 것으로 한국 정부의 재차 납치 계획 등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윤이상의 유일한 첼로 협주곡
동백림 납치 사건 이후 그는 자신잉 겪은 고통이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 등을 작곡에 반영하게 된다. 그의 유일한 첼로 협주곡이 이 시기(1975-1976)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 문화성 (우리나라의 문화체육관광부)의 위촉으로 작곡되었고 1976년 프랑스 뤼앙에서 초연되었다. 서양음악을 처음 대할 때부터 배운 첼로를 그는 평생 사랑하고 아꼈다고 한다. 하지만 젊은 시절, 그가 첼로를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찾기는 상당히 어렵다.
비평가에 따라 각기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사라지지 않는 도전의 미학'을 담고 있다는 내용은 신기하게도 다들 비슷하다. 하지만 음악 전공자가 아닌 애호가로서 쉬운 말로 표현해보자면, 시작부터 높은 피치로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거대한 오케스트라 파트는 분명 그를 간첩이라는 오명을 씌워 납치와 고문을 자행한 대한민국 정부다. 첼로 독주 선율은 윤이상, 그 자신이다. 오케스트라는 시종일관 첼로 소리를 잡아먹으려고 덮치기도 하고 첼로 선율과는 무관한 불협화음을 내기도 한다. 오케스트라가 가끔 첼로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첼로 소리는 어떤 음을 향해 고양되기도 하고 다운되기도 하며 노래하지만 그 음에 도달은 갈 듯하면서도 닿지 못하면서 그 자신이 가장 순수한 음이라고 생각한 A음('라'음)으로 끝난다. 정통 작곡기법에서는 A음으로 잘 끝맺지 않는다.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문호인 루이제 린저가 직접 그를 인터뷰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상처입은 용>에서 그는 첼로 협주곡 마지막을 '라'음으로 끝낸 이유에 대해 A음이 절대적이게 순수하고 완전한 평화 같은 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의 느낌
사실 이곡은 처음 들었을 때 가슴에 그냥 다가와 꽂히는 선율은 아니다. 그가 누군지, 인생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듣는다면 이내 눈살을 찌푸리거나 졸리다고 할 만하다. 그만큼 뭔가 많이 낯설고 편안하지 않다. 그의 삶 자체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래도 끊어질 듯 격렬하다가도 조용히 읊조리는 첼로 소리는 다른 어떤 곡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음색으로 내면의 무언가를 끊임없이 건드린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와는 전혀 반대로 인간적인 고통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구도의 몸부림 같은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데 그의 유일한 불행은 한반도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이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민족에게 지배당한 적도 없었을 테고, 나라가 둘로 갈라져 원치 않은 혼란을 겪지 않았고, 동족끼리 전쟁하는 꼴도 보지 않았을 테고, 극심한 이념 대립의 희생자로 납치 및 모진 고문을 당하지도 않으셨을 것 같다.
무대에서 연주할 수 있는 레퍼토리가 독주악기 치곤 많이 부족한 첼로인 만큼 그의 유일한 첼로 협주곡이 널리, 자주 연주되었으면 좋겠다.
몇 년전, 문재인 대통령 내외의 독일 방문 때 윤이상 선생의 봉분을 모시고 귀국해 고향 통영에 세워진 그의 음악당 어딘가에 묻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조용히 모셔온 것으로 알고 있다. 어찌 됐든 고향 땅으로 오셨으니 편안히 쉬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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