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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공연 이야기

재클린 뒤 프레의 쇼팽 첼로 소나타 음반

by 매들렌 2022.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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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리스트 재클린뒤프레의 쇼팽 첼로 소나타 음반
the discogs.com

 

영국이 낳은 불멸의 첼리스트

무명이던 영국의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가 유명하게 된 배후에는 두 명의 탁월한 천재 연주자가 있었다. 한 명은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전 세계에 알린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1916.4.22-1999.3.12)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재클린 뒤 프레(1945.1.26-1987.10.19)였다. 그녀 이전에는 아무도 몰랐다. 엘가의 첼로 세계에 이렇게나 강한 비극적인 한(恨)이 담겨 있는지를 말이다. 엘가는 자신의 마지막 주요 작품인 첼로 협주곡을 '인생에 대한 인간 본연의 자세'라고 표현했다. 1934년 그가 사망한 후 엘가의 친구였으며 당대의 명지휘자였던 존 바비롤리는 이 곡이 매우 아까웠다.
마침내 재클린 뒤 프레라는 기가 막힌 첼리스트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1965년 4월 7일,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존 바비롤리가 지휘하는 할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이 협주곡이 무대에 올랐다. 그날부터 그녀의 신화 같은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습습한 영국 땅에 내린 짧은 태양같았던 여인

살아있었다면 벌써 일흔 여섯살의 호호 할머니가 되어 있었을 텐데 그녀는 영원히 마흔 두살로 남아있다. 1950년 다섯 살 때부터 런던의 음악 학교에서 첼로 레슨을 받기 시작, 1955년 열 살의 나이로 BBC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랄로와 하이든의 협주곡을 성인 수준으로 연주해내며 본격적인 전문 연주가의 길에 들어선다. 1961년 열여섯 살 때 위그모어 홀에서 데뷔 독주회를 가졌고 적어도 영국 전역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무 살 때인 1965년 뉴욕 카네기홀에 데뷔하였고 그 해 바비롤리와 엘가 첼로 협주곡을 무대에서 연주하였고 최초로 음반 녹음을 남겼다.
<하이피델리티>의 버나드 제이콥슨은 이 연주회와 음반 녹음은 이 곡의 가장 이상적인 것이며 작곡가인 엘가 자신도 축복했을 것이라며 극찬을 했다. <가디언>지의 에드워드 그린필드는 그녀의 연주를 내 생애의 꿈이라고 절찬하면서 그해 최우수 레코드상 후보로 추천했다. 그는 자신이 이 음반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모든 음악의 마술 속에서도 가장 얻기 힘든, 순수한 집중력으로 청중의 마음을 휘어잡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몇 안 되는 음반을 모두 통틀어도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최고의 권위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재클린 뒤 프레의 전성 시대는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정도였다. 1965년에 BBC 교향악단과 함께 미국을 방문할 당시 무대 뒤의 그녀는 영국에서 온 촌스러운 여대생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막상 첼로를 잡았을 때의 당당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녀는 영국이 자국의 문화적 역량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와 미친 듯이 그의 첼로 협주곡을 긁어대는 금발의 영국 소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이상 완벽하게 만들어내기는 힘들지 않을까.

재클린 뒤 프레의 사진
Jacqueline du Pre, 1945.1.26 - 1987.10.19

 

금방 뚜껑을 따낸 싱싱한 샴페인같았던 재클린

그녀의 별명은 스마일리였다. 누구보다도 쾌활하고 잘 웃는다는 데서 비롯된 별명이다. 그녀의 웃음과 따뜻한 기질과 열광은 사람들에게 전염되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감추고 싶은 것이 없었고 감출 필요도 없었다. BBC 교향악단의 휴 맥과이어는 그녀는 항상 금방 뚜껑을 따낸 싱싱한 샴페인처럼 싱싱한 활기에 넘쳐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사랑했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 수지 역시 그녀에 대해 출연 시간에 한 시간 씩 늦기도 했고 언제나 아이처럼 허둥지둥거렸고 잘 깜빡했고 쉴 새 없이 지껄여댔는데 그 대부분이 농담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연습을 많이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연습하면 자발성이 없어진다고 생각했으며 사실은 연습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하지만 일단 연습에 들어가면 짧은 시간이지만 온통 땀범벅이 될 정도로 몰입했다고 한다. 그녀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비극의 전주곡 같았던 그녀의 결혼

그녀의 남편은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국적을 가진 유대인이었고 키가 170센티가 넘는 그녀보다 15센티가 작은 날렵한 외모를 가진 스포츠광이었다. 그녀는 처음엔 그가 참 괴상하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같이 연주해보니 그때 무언가 일어났다고, 마치 아주 오랫동안 함께 연주해 왔다고 여겨지는 그런 느낌이 왔다고 한다. 당시 어느 비평가는 그 두 사람의 연주를 듣고는 참 이상한 커플의 조화라고 말했다. 재클린은 성숙하면서도 학생 같은 인상으로 톱질하듯 활을 그어댔고 그 뒤에선 다니엘의 작은 모습은 영락없는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켰다고 기고했다.

어쨌든 두 사람은 행복했다. 일단 그녀는 마음 먹으면 완전히 몰입해 버리는 스타일이라서 15센티나 나는 키 차이나 그녀의 부모가 끔찍이 싫어하는 유대인이라는 것 역시 전혀 개의치 않았다. 1967년 중동 전쟁이 한창이던 때, 세기의 결혼식이 올려졌다. 다니엘 바렌보임과 재클린 뒤 프레가 그 주인공이었다. 여자 쪽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유대교로 개종까지 하면서 강행한 결혼이었다. 이 일로 부모는 재클린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래도 그녀는 행복했다. 여전히 힘이 넘쳤으며 드보르작의 협주곡을 연주할 때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줄을 끊어먹는 실수를 저질러도 그저 행복해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그녀 때문에 미치겠다고 아우성일 정도로 그녀의 연주회는 성공의 연속이었고 각종 명음반들이 이때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행복은 5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그녀의 마지막 연주 음반, 쇼팽 첼로 소나타 G단조

1970년이 되자 그녀는 너무 피곤해했다. 꿈속에서도 쇳덩이를 끌고 달리는 기분이었다. 눈이 침침해졌고 손가락이 저리고 차가워지며 걸음걸이도 자꾸만 볼품없어져 갔다. 남편에게 털어놓아도 정신적으로 나태해졌기 때문이라며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피로를 신경성이라고 말했다. 병원에서조차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모르는 채 일년 정도 휴식을 권했다. 언론은 그녀가 노이로제 증상에 시달린다고 떠들어댔고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다며 떠들어댔다. 1971년 6월부터 12월, 반년 간 그녀는 첼로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자신의 몸이 이상한 건 자신 탓이라고 생각하고 일주일에 다섯 번을 정신과 의사에게 진찰받으러 다녔다. 1971년 12월 어느 날 아침,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남편과 쇼팽의 첼로 소나타 G단조를 녹음했다. 다음날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를 녹음하는 중간에 그녀는 다시 극도의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녹음 작업이 되었고 그때 그녀의 나이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쇼팽 첼로 소나타 음반 표지


이것은 내가 갖고 있는 음반인데 이 음반에 실린 쇼팽 첼로 소나타 G단조가 바로 그녀가 몹시 아플 때 연주, 녹음한 것이다. 북클릿을 보니 1971년 12월 10일, 11일에 런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주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다시 나아서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 같다. 언제나 잘 웃고 긍정적인 그녀였기 때문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비극적인 짧은 인생을 예견한 듯한 엘가 첼로 협주곡처럼 쇼팽의 유일한 첼로 소나타 G단조도 쇼팽이 10여 년간 사랑해 마지않던 조르주 상드와의 이별을 예감하며 작곡한 것이다. 그것 또한 그녀의 인생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재클린 뒤 프레의 쇼팽 첼로 소나타 음반은 영원히 그녀의 마지막 음반으로 남아 있다.
그녀의 연주 생활은 결코 길지 않았다. 위그모어 홀 데뷔가 열 여섯 살 때인 1961년이며 연주를 완전히 그만둔 것이 스물여덟 살 때인 1973년이었다. 총 13년 간의 연주 생활이 그녀가 보여준 전부였고 14년 동안은 투병 생활을 해야만 했다. 예술적 감동은 이토록 신비로운 것이다. 때로는 세월이나 연륜 같은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에게는 30년 전의 사라 장이 그러했고 더 오래전에는 모차르트가 그랬다. 그는 열두 살 때 120세 된 연륜의 소리를 창조해내었다. 모차르트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재클린 또한 역시 연륜을 가볍게 거부해버린 연주자였다.


그녀의 정확한 병은 온몸의 근육이 굳어져가는 다발성 경화증이었다. 그녀 자신은 자신이 정신병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했지만 다시는 첼로를 잡을 수 없었다. 잃어버린 건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을 만큼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다. 온몸의 균형이 무너져내려 똑바로 걸을 수조차 없었고, 머리가 너무 흔들려서 독서도 텔레비전도 볼 수 없었다. 눈물 흘리는 것마저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남편마저 떠나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연주한 엘가 첼로 협주곡을 들으며 1987년 10월 19일, 그녀가 갖고 있던 최후의 마지막 하나인 삶의 끈마저 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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