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序文)
무용학자 트럼프 본드는 문화가 변화함에 따라 무용의 스타일, 형태, 그리고 내용 또한 변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전통 무용을 바탕으로 추는 한국 창작 무용(줄여서 한국 무용이라고 말하겠다)을 설명할 때 많이 인용하는 말이다. 무용과 사회는 불가분한 관계로서 무용은 한 사회와 문화의 창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1920년대 이후 부터 서양 무용에 자극받아 전통 무용의 새로운 창작 시도가 일어났다. 그렇게 주도한 이는 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최승희다. 그녀로 인해 기생집에서나 추던 전통 무용이 무대 예술로 격상되었고 새로운 창작과 해석으로 인해 세련미가 더해졌다.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몸짓과 고유의 흥이 더해진 우리의 새로운 문화 예술 장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 무용의 정의
한국 무용은 우리의 전통 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모든 종류의 무용이다. 한국 무용의 원초적 형태는 국가적 의식 끝에 있는 축제의 흥이 어깨에서 구체화되어 리드미컬하게 온몸으로 퍼져 멋으로 승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무용과 발레와의 차이점
전문가가 아닌 단순히 무용을 사랑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풀어보는 것이니 사실과 다른 점도 있을 것이다. 수 차례 발레와 한국 무용을 관람하면서 스스로 느낀 점을 여기서 늘어놓으자면 발레보다 한국 무용이 훨씬 자유스럽게 보인다. 발레가 자유로운 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가 볼 때는 그렇지 않다. 발레 무용수들은 직경 4cm 정도 되는, 토슈즈를 신은 발을 입 안의 혀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줄 알아야 전신을 악기처럼 보이게 춤을 출 수 있다. 한 마디로 4센티 정도밖에 안 되는 신발의 제약을 받고 추는 춤이니, 엄청난 인내와 끈기로 훈련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 무용은 발레보다는 훨씬 제약이 덜하다고 생각한다. 맨발로도 출 수 있는 것이 한국 무용이다. 그리고 한국 무용은 하체보다 상체의 움직임이 더 중요하다. 특히 어깨의 움직임이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어깨로부터 흐르듯이 이어지는 팔 사위, 부드러운 허릿짓이 부각된다. 또한 팔다리가 지향하는 방향이 바깥쪽인 발레에 비해 한국 무용은 안쪽을 향하는 편이다. 예전부터 비평가들은 한국 무용은 땅에 가깝고 발레는 하늘에 가깝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한국 무용은 땅에 단단히 발을 내디딘 채 부드러운 팔 곡선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요즘 한국 무용의 안무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발레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언뜻 발레와 비슷해 보이는 안무도 있다. 발레의 상체 움직임은 작품에 따라 한국 무용스러운 안무가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한국 무용이 발레보다 쉽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는 부정적인 말을 해야겠다. 이건 순전히 내가 느꼈던 관점인데 한국 무용은 장단 맞추기가 상당히 어렵다. 우리나라 전통 음악의 장단는 서양의 박자보다 훨씬 복잡하고 섬세하다. 우리나라 고유의 장단에 비유하면 서양의 박자는 단순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학교에서 배운 굿거리장단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떠올렸다면 그것을 휘모리(가장 빠르게)로 연주한다고 상상해보라!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질 것이다. 바로 그 음악을 배경으로 춤을 춘다고 상상해보라.
내가 극단적인 비유를 했지만 복잡한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장단 맞추기의 어려움은 창작 무용으로 넘어와도 쉽지 않아보인다. 퓨전 음악이라고 해도 그렇다.
한국 무용만의 매력
내가 생각할 때 한국 무용만의 매력은 자유스러움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보는 이들은 알 수 없는 나름의 규칙이 있을 것이다. 허리 짓은 이렇게 해야 하고 어깻짓은 저렇게 해야 하고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봐도 움직임이 여리여리 하면서도 힘이 느껴지기도 하며 발레와는 다른 발 사용으로 색다른 풍미와 우리 고유의 흥을 표현한다. 게다가 안무 주제에 맞는 몇몇 시그니처 동작을 빼면 배경음악의 느낌대로 즉흥적으로도 출 수 있는 것이 한국 무용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한국 무용의 두번째 매력은 한복이라는 의상에 있다. 물론 전통 한복이 아닌 무대 퍼포먼스에 맞게 개량된 한복이긴 하지만 한복이 가진 고유의 선과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옷의 결이 보는 이의 눈을 아름답게 현혹시킨다.
한복 치마의 저 퍼지는 모습을 봤으면 한다. 발레 의상으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한복은 '바람의 옷'이라는 말이 있다. 무용수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바람을 일으키고 그 바람에 따라 한복은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변한다. 마치 의상도 무용수와 같이 하나가 되어 춤을 추는 느낌이다. 발레에서의 의상은 작품의 주제를 나타나게 하는 역할일 뿐 무용수와 하나가 된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20년간 숱하게 발레를 관람해온 나의 의견이다.
무용수와 하나가 되어 옷의 결이 달라지는 한복을 보면 어쩔 땐 전율도 느낀다. 무대에 춤추는 사람이 둘도 되었다가 하나로 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 한국 무용이다. 내가 볼 때, 발레가 하늘로 비상하려고 날갯짓하는 춤이라면 한국 무용은 이미 그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위에서 추는 춤 같다. 즉흥적으로도 얼마든지 출 수 있기에 얼마든지 무아(無我)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춤이다. 무아의 세계에서 추는 춤, 바로 한국 무용이다.
아쉬운 점
한국 무용을 전문적으로 추는 무용단은 꽤 있다. 대표적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국립 무용단이 있다. 그 밖에도 민간 직업 무용단도 꽤 있다. 그러나 국립 무용단을 제외하고 정기적으로 공연을 올리는 무용단은 의외로 별로 못 봤다. 재정 문제 탓도 있을 것 같다. 발레에 비교하면 한국 무용은 관객의 선호도에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무용단이 추는 군무보다 개인이 추는 독무(獨舞)를 더 좋아하는데 그런 독무 공연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십여 년 전에는 일부러 무용 콩쿠르를 찾아가서 관람하곤 했다. 콩쿠르에서는 독무를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콩쿠르에 따라 관객을 받는 곳도 있고 안 받는 곳도 있었지만 한국 무용 부문은 늘 순서가 앞이라서 관람할 때 고생을 꽤 한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의 열정이었고 지금은 유튜브로 관람한다. 바이러스가 한국 무용 관람을 더 어렵게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바이러스가 아니어도 콩쿠르까지 찾아가며 보는 짓은 더 못할 것 같다. 체력적으로나 돈으로나 못할 일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국 무용의 매력을 깨닫고 많이 봐 주는 그날이 어서 오기를 기원한다. 그래야 제2, 제3의 최승희가 나올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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