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통해 그 너머의 것을 본다
6-70년 전에 비하면 한국 클래식 음악 교육은 눈부시게 발전한 것은 맞다. 이러한 성장은 세계 곳곳에서 정상의 무대에 오르는 한국 클래식 음악가들이 감동스럽게 증명해주고 있다. 음악으로 미국 유학을 간 1세대인 피아니스트 한동일, 백건우,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김영욱, 김남윤 등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교육자로 변신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교육 분야도 가파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여전히 유학길에 오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여전히 한국의 교육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다름'은 도대체 무엇일까.
과거 도로시 딜레이도 그렇고, 그들의 교육에는 철학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다양한 소리를 탐구하고 지긋한 나이임에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는 늘 '음악 안에 갇혀있지 말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가능하면 경험해보라'로 말한다. 음악을 통해 그 너머의 것을 보라고 가르친다.
그녀의 이력
현재 미국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의 바이올린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미리엄 프리드는 루마니아 태생의 이스라엘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두 살 때 가족들과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헤르츨리야에 정착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피아노 교사였다. 처음 그녀는 피아노를 시작했다. 그러다 여덟 살 때 바이올린으로 악기를 바꿨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Isaac Stern, 1920-2001), 네이선 밀슈타인(Nathan Milstein, 1903-1992),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 1916-1999), 헨릭 쉐링(Henryk Szering, 1918-1988), 지노 프란체스카티(Zino Francescatti, 1902-1991)를 포함하여 이스라엘을 방문한 많은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만나 연주할 기회를 얻은 행운아였다. 에리카 모리니, 앨리스 페니베스 문하에서 공부하고 1964년에 루빈 음악원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리엄 프리드는 아이작 스턴의 제자로서 미국의 줄리어드 교수인 이반 갈라미언과 인디애나 대학에서 조셉 깅골드 문하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녀의 성공적인 커리어는 1968년 제노바에서 열린 파가니니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한 후부터 시작되었다. 3년이 지난 1971년에는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그때까지 이 콩쿠르 역사상 최초로 우승한 여성이었다. 그 후 그녀는 높은 주목을 받으며 협주곡 협연자로, 독주회의 독주자로 또는 실내악 연주자로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불같은 강렬함과 파가니니 같은 완벽한 테크닉 그리고 뛰어난 서정적인 표현으로 세계 유명한 도시에서의 연주 요청이 빗발쳤다.
1993년부터 미리엄 프리드는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미국 최고의 여름 프로그램 중 하나인 라비니아 음악 축제의 Steans Institute for Young Artist의 예술감독이자 교수진을 맡고 있다. 그녀는 뉴잉글랜드 콘서바토리의 교수진 중 하나다. 그녀는 1986년부터 인디애나 대학교 제이콥스 음대에서 바이올린 교수로 재직했다. .
특히 실내악은 그녀의 음악적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멘델스존 현악 4중주단이 30년 만에 해체될 때까지 제1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했으며 아이작 스턴, 핀커스 주커만, 게릭 올슨 등 저명한 아티스트들과 컬래버레이션을 했다. 나다니엘 로젠, 그녀의 아들인 피아니스트 조나단 비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인 바이올리니트스이자 비올라 연주자 폴 비스와 함께 그녀는 보스턴 챔버 뮤직 이스트, La Jolla Chamber Music Society SummerFest, Lockenhaus 페스티벌 및 핀란드의 Naantali 페스티벌에 게스트 아티스트로 초청되었다.
그녀의 교육 목표
단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리기는 어렵지만, 기본적으로 선생에게는 학생들에게 해야 할 두 가지 역할이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전 세대의 전통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학생들이 필요한 만큼 최대한 많은 정보를 주어 그들이 독립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을 목표한다. 이러한 목표를 갖게 된 것은 아이작 스턴, 예후디 메뉴인, 네이선 밀슈타인, 헨릭 쉐링 등등 위대한 선배 연주자들의 영향도 있지만 그녀 스스로의 탐구를 통해 자신만의 철학과 목표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이 중요한지,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스승의 역할, 연주자의 역할 그리고 사회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한 견해가 수년에 걸쳐 발전되었다.
경험에서 오는 작은 가치에 주목
그녀가 말하는 경험이란 한 작품을 400번 연주하는 것을 500번 이상 연주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무엇이든 경험을 통해 어떤 인식의 변화가 있었는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크고 빠르고 시끄러운 것을 지향하며 미묘한 가치를 잃고 살아가고 있다. 삶의 경험처럼 함께 발전하는 것들은 미묘해서 감지하기 힘들고 지금 사회는 이것을 위한 공간조차 없는 실정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봤을 때 가장 소중한 순간들 중 하나는 바로 위대한 예술가들과의 교류였다고 한다. 아이작 스턴, 파블로 카잘스, 예후디 메뉴인, 네이선 밀슈타인 등의 연주를 보고 듣고 함께 연주할 수 있었던 경험은 그녀의 나이 일흔이 넘은 지금 크나큰 인생의 자산으로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녀는 종종 그녀의 수업에서 바이올린과 음악과는 크게 관계없어 보이는 사회 이슈나 정치 분야의 이슈와 관련된 토론을 하기도 한다. 미리엄 프리드 교수는 음악가나 예술가 역시 지역 사회 일원이고 국가에 세금을 내고 선거권을 가진 국민이니만큼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 동안 예술가들은 그런 문제에서는 거리를 두는 양상이었지만 그녀는 제자들한테 절대 그것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요즘은 세계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콩쿠르가 존재한다. 미리엄 프리드 교수가 젊었을 당시에는 국제 콩쿠르는 다섯 개 정도밖에 없었다. 그래서 콩쿠르에서의 우승은 음악가로서 커리어를 쌓아가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셀 수 없이 많은 콩쿠르 우승자들이 세계 도처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에 따라 클래식 음악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된 지 오래되었다. 그녀는 콩쿠르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콩쿠르 우승만을 위한 연주자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무대에 서서 관객들과 음악을 나누는 소통을 할 수 있고 오케스트라와 연주도 해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주는 콩쿠르의 순기능은 무시할 수 없는 건 사실이다. 각고의 노력으로 콩쿠르의 두터운 벽을 뚫었다고 해도 그것이 남은 연주 커리어에서의 명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형태의 방법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마도 콩쿠르가 필요하다.
음악을 넘어 세상과의 소통을 가르친다
미리엄 프리드 교수와 우리나라의 정경화 선생님이 한창 활동이 왕성하셨던 젊은 시절, 여전히 여성 연주자들은 결혼만 하면 연주를 그만두고 은퇴하는 관습이 만연해있었다. 은퇴 안 하면 되었을 것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시절엔 여전히 여성의 사회활동을 곱게 보지 않은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남녀는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하고 여자는 결혼하면 가정주부가 되어 집안일만 해야 하는 관념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정경화 선생님도 줄리어드 스승이었던 이반 갈라미언 교수한테 '너 결혼할 거니, 넌 결혼하지 마라'는 말을 수차례 들었다고 한다. 정경화 선생님의 재능이 아까워서 결혼하지 말았으면 하는, 어쩌면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염려이겠지만 동갑내기 경쟁자였던 핀커스 주커만에게는 지휘자에게 소개해주는 등의 기회를 만들어주어도 정경화 선생님한테는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하면 은퇴해버리고 썩힐 재능을 내가 뭐하러 기회를 주느냐는 생각을 하신 듯하다.
미리엄 프리드 교수 또한 그런 세상의 관념으로부터 많이 부딪히고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녀 또한 줄리어드에서 이반 갈라미언 문하에서 바이올린을 배운 제자로서 '여자는 결혼하면 은퇴'라는 관념에 묶여있던 스승의 편견과도 싸워야 했다. 하지만 그녀나 정경화 선생님이나 결혼은 했어도 은퇴하지 않았고 보란 듯이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분들 세대는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음악을 넘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강제로 빼앗긴 세대이다. 세상과의 소통이 아니라 세상의 편견과 싸워 이겨야 했기에 그 과정에서 흘려야 했던 눈물과 고충은 감히 짐작할 수도 없다.
지금은 자신들의 세대와 다르게 소통이란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그녀는 가르치는 일이 더할 수 없이 기쁘고 보람될 것이다. 아들인 피아니스트 조나단 비스와 가끔씩 듀오로 연주하기도 하며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가끔 하고 있는 듯하다. 유튜브에 비교적 최근 그녀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영상이 하나 있다. 개인적으로 근래 가장 감동적으로 들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였다.
그녀가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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