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실물 영접한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무대 위를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올 때 든 생각은 많이 늙었다라는 것이었다. 연한 금빛 은발 머리칼을 엣지 있게 빗어넘긴 헤어스타일부터 정석처럼 입은 연미복에 나비 넥타이까지 모조리 내 취향이었다. 쇼팽 발라드 연주곡집을 LP와 CD로 소장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피아니스트로서 늘 그의 연주 실황을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실물 영접에 성공했다.
그는 바흐의 파르티타 1번과 2번, 브람스의 간주곡 그리고 쇼팽 소나타 3번을 연주했다. 나는 첫 곡인 바흐 파르티타 1번 B♭장조 1악장의 첫 음부터 빠져들었다. 바흐의 피아노 작품은 많이 들어보지 않았고 이 작품도 이날 처음 들은 곡이었다. 손동작 하나하나까지 전부 계산해 놓은 사람처럼 그는 소문대로 완벽했다. 내게는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만큼이나 완벽한 연주자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들었던 연주는 마지막 곡인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 B단조였다. 아니, 마음에 들은 정도가 아니라 최고였다. 긍지 높은 행진곡 풍의 1악장이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손가락 끝에서 건반을 통해 화려한 꽃으로 처럼 피어났다. 수도승처럼 완벽한 무대를 위해 일생을 다 바쳐온 피아니스트가 찾아낸 쇼팽 음악의 숨겨진 뜻은 말로도 표현하기 힘든, 푹 빠져 들은 연주였다.
그는 시종일관 기교를 절제하며 연주의 흐름을 이어갔다. 마지막 4악장에서 음표들을 유려하게 연결하는 아르페지오를 선보이며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유영하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연주 효과를 화려하게 극대화시키지 않고 적재적소에 맞는 음색과 울림을 들려주었다. 과거 쇼팽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답게 쇼팽 곡을 제일 잘 쳤다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이날 그가 연주하는 피아노라는 악기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가 직접 가지고 다니며 조립해서 쓴다고 하니 소리는 어떨까 싶었다. 그가 가지고 온 피아노는 소리의 울림이 아주 넓게 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맑고 영롱한 소리가 아니라 명료하고 웅장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래는 2월 17일에 끝났어야 할 공연이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자가격리 문제 때문에 일정이 뒤로 밀려서 3월 4일 오늘에 이르러서야 대전 공연을 개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공연 며칠 전부터 주최측으로부터 짤막한 공지를 문자로 받았다. 공연 당일날 절대 사진 촬영이나 동영상 촬영을 하지 마라면서 연주자의 각별한 요청이라고 했다. 공연장에서도 여러번 이런 내용이 나왔다. 원래 공연장에서의 지켜야할 예절이지만 사실 잘 지켜지지 않는 아니, 지키기가 어려운 예절이다. 그런데 그것을 몇 번이고 강조하는 것을 보고 전에 했던 공연에서 누가 동영상 촬영하다가 들켰나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기사를 검색해보니 서울 공연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고 했다. 그것도 여러 번이나 말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동영상을 촬영하는 사람들은 없었나보다.
한국에 정말 오랜만에 와서 그것도 지방 투어 중인, 이제 가면 또 언제 올지 모르는 거물급 연주자에게 엄청난 민폐를 저지른 셈이다.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돌아가길 바랐는데 참 안타깝다. 내가 다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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