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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공연 이야기

20세기 가야금의 대부, 故 황병기 선생님

by 매들렌 2022.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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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을 옆에 세워두고 촬영한 고 황병기 선생
황병기 (1936.5.31-2018.1.31)

 

 

정치부터 예술까지, 그야말로 만세의 스승인 공자(기원전 551~479)는 음악이 도덕과 덕성을 함양한다고 믿었다. 공자 시대 군자는 학문과 시문뿐 아니라 예술과 음악에도 능해야 했다. 5현의 금(琴)을 연주할 줄 알아야 사회적 위세도 따랐던 까닭에 금 자체가 마침내 성찰과 지적 올곧음을 판별해 주는 상징이 되기까지 했다. 금은 귀가 아니라 정신에 쾌를 가져다주는 것이고 손끝으로 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금이 연주되지만, 악기를 연주하되 무성(無聲)을 지향한다는 생각이 한국이나 일본처럼 음악을 사랑하는 나라들에서 금이 사라지게 했을 법하다. 그러나 음악(音樂)의 가치의 상징체로서 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일반의 의식 속에서 전통악기는 역사적ㆍ사회적 지위를 묻지 않고 무엇이든 전통과 고도의 문화의 상징이라는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한때는 정신보다는 귀를 즐겁게 하는 악기였을 한국의 가야금, 중국의 쟁(箏), 일본의 고토(琴/箏)등 안족 달린 현악기들도 마찬가지다.

 

 

 

 

황병기의 음악

한국에서 귀와 정신을 다 즐겁게 하는 음악이라면 단연 황병기 선생님의 가야금 음악이다. 향기, 색깔, 분위기, 영상, 느낌 등등 추상적 악상들이 명징하게 단순 명쾌하게 우아하게 그림같이 나타나는 모습은 젊은 시절 민속악과 정악을 다 배워 아ㆍ속(雅ㆍ俗)의 경계를 공식적으로 뛰어넘은 해방 후 첫 세대라는 그의 위치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20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홍등가의 기생 음악으로만 여겨지던 가야금을 그는 거의 혼자 힘으로 공자 시대 금의 지위까지 끌어올렸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황병기 선생님은 피난시절인 1952년, 부산에서 처음 가야금을 익히기 시작하셨다. 국립국악원이 부산에서 다시 문을 연 이듬해이고, 서울대학교에 처음으로 국악과가 설치된 1959년보다 한참 앞선 때다. 첫 창작곡 <숲>을 1962년에 작곡해서, '창작 국악'이라는 새 장르를 모색하는 움직임에 불을 지폈다. 유럽이나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에까지 도입된 '작곡'이니 개인 '작곡가' 니 하는 개념이 전통음악 분야에선 아직 생소하던 때다. 음악은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악보 없이 전승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조금씩 유기적으로 핵심 가락을 유지한 채 그때그때 잔가락을 임의로 덜고 더해 가며 변해가게 마련이었다. 그런 만큼 황병기의 작품은 혁명과도 같았다.

 

그의 초기작품들은 전통 악무(樂舞)하면 곧 퀴퀴하고 졸박함을 연상케 하던 시절에 나왔다. 한국에서 전통음악은 무지와 미신과 가난에 찌든 분위기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일제 강점과 전쟁의 상처를 내던지려는 한국인들에게 외면당했다. 반면 서구 클래식 음악은 근대성과 산업화와 과학기술을 연상케 했고, 이것들이야말로 한국이 추구해야 할 바라고 식자층은 생각하고 있었다. 

 

황병기 가야금 작품집 LP
LP음반 자켓 표지

 

전통 예술의 멸실을 막기 위해 인간문화재라는 제도가 생긴 것은 그 반작용이었다. 몇 년 뒤, 잃어버린 민중예술을 되살리고 이렇게 되살린 문화를 참 주인인 민중에게 '돌려주자' 는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인간문화재든 민중운동이든 목적은 하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고 미디어와 전시와 연주를 통해 확산시킴으로써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해 한국인들이 식민지 체험을 딛고 다시 한번 역사와 하나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찬란한 과거 문화를 재확인하여 민족의 상처를 씻어내는 한편, 민족문화의 정수에 다가감으로써 소외의 역사에 종지부를 역사를 통한 현재의 구원을 추구했다. 이렇게 '민족음악' 은 닻을 올렸다. 그는 이 운동의 일원이기도 하고 대척점에 서 있기도 하다. 그는 한국의 문화재위원이면서 국제현대음악협회 회원이다. 

 

황병기 작품의 다수는 한국이 아시아의 강국으로서 대 아시아 문화의 일원으로 비단길같은 교역로를 통해 서역과 교류하던 통일신라(668-935)의 영화로운 과거를 상기시킨다. 

 

예를 들자면, <하림성>은 기록상 최초의 가야금 연주가인 우륵이 551년 신라 진흥왕을 위해 연주한 곳의 지명을 땄다. <침향무>는 인도 향료의 이름을 땄고, 신라풍 범패의 음계가 나오며 지금은 사라진 중국 및 서역계 악기 공후의 소리를 염두에 두고 썼다. 

 

그러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사라져가는 예술의 수호자로서뿐 아니라 자기 나름의 관점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자기 음악에 힘을 더할 길을 찾아 나서는 역동적 예술가로서도 황병기 선생님은 곡을 썼다. 가야금을 위한 새로운 곡을 작곡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작품의 예술적 해석과 자기의 음악 철학을 드러내어 주는 글들도 써냈다. 존 케이지 같은 작곡가의 작품을 연구, 해석한 글을 펴내기도 했다. 1985년에는 초빙교수로 하버드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글과 작품과 연주를 통해 학계와 일반 대중에게 던진 그의 메시지는 (굳이 그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는 사실과 굳이 연관시키지 않더라도) 전통음악이 퀴퀴하고 졸박함, 망가진 산하, 촌티 나는 해학, 전쟁의 상흔 따위 이미지를 불식하고 근대적 지성과 전 지구적 음악의 경제학 세계로 진입하는 디딤돌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생애

1952년 한국 전쟁이 한창일 때 피난으로 내려간 부산에서 경기중학교 3학년생으로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3학년 재학 중이던 1957년 KBS주최 전국 국악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1959년부터 서울대학교 국악과에 출강했고, 1962년에는 작곡을 시작하여 다음 해에 첫 창작곡인 <숲>을 내놓아 '창작 국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서울대 법대 출신 국악인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자랑한다. 본래 가야금은 취미에 가까웠다고 한다. 대학 시절에는 제대로 된 국악과도 없었을 정도로 국악계가 참으로 비루한 시절이었던 때라 처음부터 국악인으로 진로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국악과가 있었다해도 자신은 법학을 공부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악과 학과장으로 그를 초빙하면서 본격적으로 국악인의 길로 들어선다.

 

전통 악기를 다루지만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굉장히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하였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첼로 활로 가야금을 연주하는 기법이다. 유튜브에서 '황병기, 미궁' 이라고 치면 공연 영상을 있다. 꼭 한 번 감상해보기 바란다. 소름이 끼칠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원래 '튕기기'로 소리가 짧게 끝나는 기존의 가야금 음색이 아닌 바이올린처럼 길게 음이 늘어나는 독특한 음색이 나올 수 있었다. 

 

 1975년에 발표된 미궁은 매우 파격적이어서 별의별 루머가 돌기도 했다. 심지어 작곡가 자신이 이 작품을 작곡한 직후 사망했다는 루머도 있었다. 실제로도 너무 괴기스러워서 공연을 감상하던 한 여성 관객들은 겁에 질려 실신하거나 발작을 일으키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2018년 1월 31일 오전 3시에 폐렴으로 타계하셨다. 향년 82세.  그날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엔딩 곡으로 그의 연주곡인 <춘설> 을 띄우며 그를 추모하였다. 몹시 안타깝고 슬프지만 요즘 같은 팬데믹을 겪지 않으신 것이 참 다행이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가야금은 진정한 우리의 전통 악기로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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