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바이올린의 디바
20년 전에 녹음된 안네 소피 무터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우리 시대 바이올린의 디바로 여전히 군림하고 있는 그녀가 베토벤 협주곡 특유의 진지하고 휴머니즘이 생각날 정도로 사려 깊은 예술적 선율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는 음반이다. 지난 2015년 12월에 타계한 독일 출신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 1927-2015)가 지휘봉을 잡고 그가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마지막 녹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십 년 전인 2002년 5월 뉴욕에 위치한 링컨센터의 에이버리 피셔 홀에서 있었던 뉴욕 필 정기 연주회의 생생한 현장을 그대로 포착한 음반이다. 게다가 이 음반을 녹음할 때는 그녀가 아직 소녀티가 채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거장 카라얀과의 녹음을 선보인 지 거의 20년 만의 일이었다.
매력적인 악센트, 따스한 톤
음악을 대하는 독자적인 진지함은 이미 그녀가 어릴 적부터 인정받은 중요한 성취였다. 물론 처음에는 이렇듯 나이에 걸맞지 않은 여유롭고 장중하며 우아한 연주 스타일의 완성도에 대해 의문을 품는 비평가들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최초에 자신의 커리어를 이끌어 준 카라얀의 후광 역시 안네 소피 무터의 연주 기량을 평가함에 있어서 오히려 종종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곤 했다.
결국 시간의 시험에서 무터는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된다. 처음에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빼어난 기량을 보이던 많은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음악적인 성숙기를 제대로 맞기도 전에 연주 무대에서 혹은 예술적으로 도태되고 마는 현실에서 그녀의 존재는 유독 빛을 발한다. 오늘날 거의 대량생산의 기미마저 보이는 아시아계와 유대계의 어린 바이올리니스트들 역시 이러한 미덕, 즉 진지하고 학구적인 태도와 미적인 감수성의 조화가 결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데뷔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지속적으로 선보인 모차르트와 브루흐, 멘델스존, 브람스 등의 바이올린 협주곡 레코딩들에서 그녀는 오스트리아-독일 악파 특유의 심각하고 진지한 태도와 열정, 장중하면서도 감미로운 톤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음을 단번에 입증했다. 이러한 연주 스타일은 전쟁 시대 독일 바이올린 계를 이끈 게오르그 쿨렌캠프나 푸르트벵글러가 총애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에리히 뢴의 전통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으며 더 위로는 파리와 브뤼셀에 정며으로 맞서며 베를린에서 황제처럼 군림했던 요제프 요아힘의 빛나는 전통으로까지 소급되는 것이다. 그녀 역시 이 전통을 계속 이어갈 생각인 것 같다. 그녀가 아직까지도 파가니니, 비외탕, 비에냐프스키의 협주곡들을 그다지 즐겨 연주하지 않는다는 점은 자신이 서 있는 음악사적 지점에 관해 상당히 깊이 열중하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녀가 연주하는 솔로 파트는 전체의 흐름을 하나로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좋은 인토네이션과 무리 없는 악센트, 그리고 다소 따뜻한 톤과 잘 어울리는 레가토적인 프레이징들로 가득 차 있긴 하다. 당연히 그녀는 10불짜리 바이올린으로 명기(名器)인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테크닉과 연습량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는 거의 어려움을 모른 채로 성장해 왔지만 좋은 지적, 예술적 전통과 월등히 우수한 기량 위에 더해진 감정적인 풍부함이야말로 그녀가 오늘날까지도 대중적인 명성을 누리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카덴차에서 느껴지는 거장의 에너지
이십 년 전 녹음된 베토벤 협주곡에서 그녀는 대단히 느린 템포로 연주하고 있다. 카라얀과 함께 한 이전 녹음에서는 느리고 장대한 펼침과 중첩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카라얀의 흥청거림 탓이라고 폄하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바이올린의 디바로 성장한 그녀 자신의 개성이기도 하다.
작품의 창작 시대와 스타일에 따라 스케일을 다양하게 가져가면서 그녀가 구사하는 드라마틱한 유려함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쿠르트 마주어의 협연은 카라얀에 비해 직선적인 활력과 현대적인 목관 파트, 간결하면서도 오히려 섬세해진 뉘앙스가 돋보인다. 그리고 카라얀의 교향곡적인 울림이 아닌, 잘 통제된 관현악의 진행 속에서 그녀의 독주는 더욱 돋보인다. 그녀는 카덴차에 대해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진 않은 것 같다. 그녀가 차용한 크라이슬러의 카덴차는 그녀의 활 끝으로부터 장중하게 뽑아져 나온다.
협주곡과 함께 수록된 두 개의 로망스는 협주곡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간 지점을 보여 준다. 여유로운 호흡 속에서 일구어지는 내적 친밀감과 독일 악파 특유의 레가토는 그때까지 그녀가 도달한 예술적 봉우리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
우리 나이로 올해 환갑이 되는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
그녀는 지난 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나타난 바이올리니스트들 가운데 신동으로부터 거장의 경지에 이르는 험난한 코스를 가장 성공적으로 돌파해낸 몇 안 되는 경우에 속한다. 그녀의 예술적 성장 과정에는 현대 음악 작곡가들과의 활발한 교류도 있었겠지만 그녀의 개인적인 수많은 문제들을 겪고 해결해야 했던 과정도 당연히 기여했다고 본다.
이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이 발매된 지도 벌써 20년이 됐다. 녹음 과정에 참여했던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도 유명을 달리하여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도 연주하고 있다. 최근 새 음반 발매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팬데믹이 끝나면 내한 공연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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