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플래시 백 연극 영월행 일기
내가 본 이강백 극작가님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1995년 극단 세실이 제19회 서울연극제에서 공연해 희곡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그해 10월 3일부터 10월 15일까지 채윤일 연출로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조당전 역할에 배우 김학철 님, 김시향 역할에 이화영 님이 맡았다. 그밖에 김종칠, 장우진, 최대웅이 고서적 동호 회원을 연기했었다.
1996년 제 4회 대산문학상 희곡상 수상작이다.
영월행 일기장을 열어보다
고서적 수집가인 조당전은 인사동의 한 고서점에서 500년 전에 한글로 쓰인 <영월행 일기>를 구입한다. 그 책은 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 시대, 신숙주의 하인과 한명회의 여종이 당나귀를 타고 영월을 다녀오는 일기로 되어 있다.
그 당시 영월에는 왕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난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세조와 조정 대신들은 단종이 유배지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자 종들을 밀정으로 보낸 것이다. 조당전의 동료들인 <고서적 연구 동호회> 회원들 사이에는 이 <영월행 일기>의 진위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그들은 조당전의 서재에 모여 <영월행 일기>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입증시킬 수 있는 고서적 자료들을 분석, 연구한다. 세조와 단종을 둘러싼 과거의 일들이 고서적 연구가들인 염문지, 부천필, 이동기의 개인적 성격과 연계되어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인사동의 고서점을 통해 <영월행 일기>를 팔았던 김시향이 조당전을 찾아와 그 책을 되돌려 달라며 간청한다. 그 책은 남편 모르게 훔쳐 판 책으로 남편은 대단히 분노하며 책을 찾아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한다는 것이다. 즉, 김시향과 그녀의 남편은 마치 조선 시대의 주종관계와 똑같다. 조당전은 김시향에게 <영월행 일기>를 되돌려주는 조건으로 그 책의 내용을 재현할 것을 제안한다.
김시향은 나무를 깎아 만든 당나귀를 타고, 조당전은 당나귀의 고삐를 잡아끌면서 영월을 다녀온다. 그러나 그 여행 공간은 조당전의 서재이면서 아울러 세조 당시의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세 차례 영월을 다녀온다. 그들은 첫 번째 갔을 때 단종의 얼굴은 무표정, 두 번째는 슬픈 표정, 세 번째는 기쁜 표정이다. 세조는 단종의 무표정과 슬픈 표정에는 살려주었으나, 기쁜 표정에는 참지 못하고 사약을 보내 죽인다.
연극 영월행 일기는
무려 500년 전과 현재의 시공간을 중첩함으로써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회구하는 인간의 갈망을 심도 있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조당전에게 김시향이 찾아와 <영월행 일기>를 다시 돌려달라고 찾아오는데 한 마디로 그녀는 남편의 왜곡된 심한 억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자유를 구해야 하는 이 극의 주제를 보여준다.
작품에는 권력의 억압과 자유 사이의 갈등을 형식과 내용,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립으로 표현해냈다. 극중극을 통해 플래시 백 기법을 차용했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상상, 역사와 허구의 간극을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연극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이 작품의 묘미다. 특히 이 작품은 책과 나무로 만든 가짜 당나귀가 등장하는데 이 당나귀는 조당전과 김시향, 관객들에게 연극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현재와 과거, 현실과 상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역할을 한다.
나는 운 좋게도 1995년 제 19회 서울 연극제에서 초연했던 이 작품을 관람할 수 있었다. 아직 미성년이었지만 정말 우연한 기회로 표를 얻었다. 그날 이후 27년이 지났다. 초연 이후 한 번도 이 작품을 보지 못했지만 별로 아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초연 때의 배우들 연기가 너무 훌륭해서 내 마음속에 화석처럼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연극을 보면서 조당전과 김시향이 나중에 서로 애정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연극은 절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타의로 아침드라마를 많이 봐서 그 여파였지 않았을까.
아무튼 세조 시대와 지금 현재의 시점을 넘나들며 전개되는 이 작품은 자유를 수용하는 인간의 태도가 역사를 통해 영원히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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