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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공연 이야기

음악 천재들 이야기, 사라 장 & 조성진

by 매들렌 2022.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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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ah Chang and SeongJin Cho
Sarah Chang and SeongJin Cho

 

사라 장(장영주) 이야기

1980년 12월 10일,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병원에서 사라 장이 태어났다.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와 작곡가 어머니 사이의 첫째 아이였다. 영주(永宙)라는 이름은 서울에 계신 할아버지가 이미 지어 놓으셨지만, 미들네임으로 영어 이름도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선물로 받은 이름 몇 개 중 하나를 선택해서 출생신고서를 제출했다. 

영주 사라 장. YoungJoo Sarah Chang. 

 

서너 살부터 CM송이나 동요를 피아노로 달려가 그대로 쳤고, 아버지의 연습곡을 듣고 있다가 바이올린으로 정확히 그 음을 짚어냈다고 한다. 참으로 근묵자흑(近墨者黑, 주위 환경이 중요하다는 뜻)이라는 옛 고사성어가 잘 어울리는 일화이다. 사라의 부모님은 유학생 신분이었고 어머니는 태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열심히 책 읽고 공부한 것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무튼 아버지의 비싼 바이올린을 못 만지게 하려고 1/16 크기의 바이올린을 대여해서 고사리 같은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운명인 듯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배운 지 일 년 만에 필라델피아 지역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줄리어드는 여섯 살 때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그곳에서 당대 유명한 바이올린 교수였던 도로시 딜레이(2002년 3월 타계)와 강효 교수한테서 가르침을 받았다.

 

뉴욕 데뷔 이야기

여덟 살에 뉴욕 필하모닉과 데뷔하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사라 장의 연주를 들은 지휘자 주빈메타는 너무 감동받았고 다음 날 저녁에 예정된 뉴욕 필하모닉 정기연주회의 특별 독주자로 발탁했다. 문제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독주자와의 리허설이 필수인데 사라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뉴욕 필하모닉은 이미 드레스 리허설(실제 공연처럼 턱시도를 갖춰 입고 하는 리허설)까지 다 마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여덟 살 꼬마였던 사라는 리허설 한번 없이 링컨센터 라이브 홀에 섰고 연주하기 어렵기로 유명한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를 입이 떡 벌어지게 연주했다. 그녀의 신화 같은 커리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협연을 끝내고 사라의 부모님을 무대 뒤에서 만난 지휘자 주빈 메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환생을 믿습니까? 사라는 전생에 틀림없이 바이올리니스트였을 겁니다."

 

 

베를린 데뷔 이야기

클래식 음악 연주의 성지(聖地) 단체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첫 협연 무대는 뉴욕에서와는 다르게 리허설을 했고 단원들조차 누가 더 박수를 많이 치는가로 경쟁까지 했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베를린 시민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열 세 살 먹은 한국계 미국인 신동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바로 객원 지휘자로 주빈 메타를 지목하기 전까지 말이다. 주빈 메타는 당연하다는 듯이 솔로이스트로 사라를 선택했고 연주곡목은 뉴욕에서와 마찬가지인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였다. 하면 얼마나 하겠어라는 마음으로 듣고 있던 단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라의 연주에 혼이 나갔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사라의 유럽 매니저가 베를린에서의 성공을 확신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연주에 흠뻑 취해서 객석에서 1악장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는다는 룰을 어기면서까지 말이다. 다음 날 베를린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과 일간지에서는 1면에 그녀의 이야기가 도배되었다. 전날 그녀의 연주를 "트라이엄프!"라며 극찬을 날린 독일 유력 언론(아마도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였을 것이다)도 있었다. 

 

여덟 살 데뷔 이래로 지금까지 꾸준히 연주 활동을 계속 해 오고 있는 그녀다. 신동에서 성인 연주자로 무난하게 성장했다. 일 년에 150여 개의 연주를 소화했던 그녀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인정한 바 있다. 코로나19가 유행하고 있는지금은 얼마나 연주를 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우리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계속 들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SeongJin Cho
Seong Jin Cho 조성진

 

조성진 이야기

부모님이 음악가인 사라와는 달리 조성진의 부모님은 지극히 평범하시다. 아버지는 건설회사 중간 간부이고 어머니는 가정 주부였다. 1994년 5월 28일 태어난 성진이는 어릴 때는 말이 없는 과묵한 성격의 아이였다고 한다. 그러다 여섯 살 때 친구 따라 피아노 학원에 가게 되었고 그렇게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다. 바이올린은 7세 때 시작했다. 두 악기를 동시에 배우다가 열 살 때 피아노에 전념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피아노는 앉아서 연주하기 때문이라나. 그 후 서울 예술의 전당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피아니스트의 길에 들어섰다. 열한 살 때, 음악춘추 콩쿠르에서 1등 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내었고, 그다음 해에 금호 영재 콘서트를 개최했다. 성진이는 금호 그룹 박성용 회장이 생애 마지막으로 발굴해낸 영재였다.  예원학교에 입학해서는 피아니스트 신수정 교수를 사사했다. 2008년 열다섯 살 때부터 모스크바 국제 청소년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1등 상으로 받으며 본격적으로 해외 콩쿠르에서도 수상하기 시작한다. 참고로 모스크바 콩쿠르는 외국인 참가자들한테 1등 상을 준 경우가 극히 드물다. 외국인이 그 콩쿠르에서 2위 했다고 하면 사실상 우승이나 마찬가지로 간주하는 곳이다. 그런데 외국인인 조성진한테 1등상을 줬다는 건, 그만큼 그의 실력이 출중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2009년 하마마쓰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연소이자 아시아인 최초로 1등 상을 받았고, 2011년 서울예술고등학교 2학년 때 참가한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3위를 했다. 이때 2위는 손열음이다.  

 

2012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 파리 국립 고등 음악원에 입학하여 2017년 여름까지 파리에서 살았다.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 전, 프랑스어 능력 검정시험(DELF)에서 B1(대학 입학 가능 수준)을 취득했다. 그것을 그는 그때까지 살면서 가장 기쁜 순간이었음을 회고했다. 2014년에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국제 콩쿠르에서 3위를 수상했으며 고국으로 돌아와 4주간의 군사 훈련을 받았다.

 

 

제17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2015년 10월, 우리나라에 낭보가 날아왔다. 그가 명망 있는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1위를 했다!!! 게다가 마주르카 상과 폴로네이즈 상까지 모두 그가 휩쓸었다!  심사위원들과 객석의 청중들까지 모두를 매료시킨 그의 연주 능력은 콩쿠르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예선에서 시작해 본선 1, 2, 3차 그리고 결선에 이르기까지 감정 기복 없이 매 라운드를 압도적인 기량과 진화한 해석을 거치면서 안정적인 우승을 일구어냈다. 더불어 현존 최고의 클래식 음악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 사에서 콩쿠르 실황 음반을 발매했는데, 이것이 국내외 10만 장의 판매를 기록하며 대 히트였다. 2015년 연말, 한국의 가온 앨범 결산 차트에서 35위(75,798장)에 이름을 올렸는데 비아이돌 음반이 50위 안에 들기는 그만이 유일했다. 이것은 한국 클래식 음반 사상 전례가 없는 대기록이다. 추가로 발매된 LP음반 역시 빠르게 품절되어 지금 현재는 구할 수 조차 없다. 

지금까지 많은 콩쿠르에 참가한 성진이지만, 사실 그는 콩쿠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경쟁을 싫어하고 콩쿠르를 앞두면 신경이 곤두서게 되어 잠을 편안히 잘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하지만 직업 연주가가 되기 위해서는 경력과 함께 PR도 필요한 법이다. 그걸 알기에 싫어도 콩쿠르에 참가할 수 밖에 없었다.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더 이상 콩쿠르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제일 기쁘다."라며 좋아했다. 

 

 

콩쿠르 우승 뒷 이야기

입상자 발표 후 예선부터 결선까지의 채점 결과가 공개되었다. 심사위원 중 한명인 프랑스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필립 앙트레몽이 시종일관 성진이에게 10점 만점에 1점을 준 것이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최하점을 받았음에도 나머지 심사위원들에게서 9 내지 10점을 얻어냄으로써 2위와 5점 차이로 우승한 것이다.  앙트레몽은 본선 2차와 3차 통과 여부에서도 17명의 심사위원 중 유일하게 조성진에게 'NO'로 의사를 표명했다. 심지어 이런 악용을 막기 위해 평가 점수 체계를 바꾼 2015년 콩쿠르이었음에도 자신의 권위를 악용한 것이어서 관련 업계에서 지금까지도 비판이 따르고 있다.

여담인지 진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성진이에게 1점을 준 이유는 첫째, 무대에 오를 때의 용모가 그가 가진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린 것이 적어도 쇼팽같이 권위를 지닌 콩쿠르에서 이런 용모는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예의가 없다라는 판단에서라는 것이다.

둘째, 조성진의 지도교수인 파리 고등 음악원의 미셸 베로프와 필립 앙트레몽이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이 아니냐는 점이다. 미셸 베로프는 한국 더 피아노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나와 필립은 일반적인 동료로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성진에게 1점이나 NO를 준 것은 나에게 반하는 행동이라 할 수 없고, 성진에게 반하는 행동이었다." 이 말은 자신과 사이가 나빠서 그랬을 것이다라는 말보다 더 강도 높은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순전히 성진이의 음악성을 엉망으로 평가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용모 관련 이유에 대해 내 생각을 말하자면, 정말 필립 앙트레몽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말도 안 된다. 200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라팔 블레하츠의 모습을 유튜브로 한번 보시라! 머리카락이 눈을 가릴 지경이다. 그는 성진이가 동양인이라서 인종차별을 한 것일까 아님 성진이의 음악성에 질투가 나서였을까.  

정작 당사자인 성진이는 이 논란에 대해 "사람마다 평가의 기준은 다를 수 있으며 그의 뜻을 존중한다."라고 필립 앙트레몽의 1점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성진이는 세계적인 지휘자와 유수한 오케스트라의 초청을 받아 연주해오고 있다. 

 

 

나의 오랜 꿈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나의 오랜 꿈이 뭐냐고 묻는다면, 사라가 한국 출신 음악가들과 협연도 하고 음반 녹음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꿈은 2018년 2월, 예술의 전당 개관 30주년 기념으로 국내 연주자들과 함께 한 공연으로 어느 정도 이룬 셈이다. 또 하나의 꿈이 있다면 성진이와 사라의 협연 무대이다.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비드 오이스트라흐와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처럼 듀오로 연주하고 음반 녹음도 했으면 좋겠다. 사라와 성진의 듀오 무대를 기대하며 그 공연에 꼭 청중으로 참여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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