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연주자를 어떻게 대하여야 할까
악보를 읽어 구체적인 소리로 우리에게 음악을 전달해주는 클래식 음악 연주자는, 감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작곡가보다도 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악보를 읽지 못하는 일반인이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연주자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설령 악보를 읽고 그 음악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은 음악 감상이라고 볼 수 없다. 음악 감상은 바로 연주를 듣는 행위이다. 연주자는 우리의 문화적 삶에서 어떤 존재인가, 연주자가 듣는 사람보다 음악을 더 잘 아는가, 우리는 연주자의 태도를 어디까지 용납해줘야 하는가, 우리는 연주자 앞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등은 음악을 감상하는 우리에게서 떠날 수 없는 문제들이다.
혹자들은 요즘처럼 음반과 스트리밍이 넘쳐나는 시대에 연주자들이 옛날만큼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음악은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클래식 음악 감상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연주회장에서 연주를 듣는 것이다. 다 같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해도 한 달 전에 들은 연주와 지금 듣는 연주가 같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같은 연주자라 해도 예를 들어 우리의 사라 장이 한 달 전에 뉴욕에서 연주한 곡과 지금 서울에서 연주하는 곡이 같은 곡이라도 해석과 소리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달라져야 맞다. 그런 의미에서 클래식 음악 연주자는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위치에 있다.
과거 귀족 사회가 있던 시절에는 연주자의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았다. 이는 계급이 정해진 사회에서는 기술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뛰어난 음악가는 단순히 '기술자'로 여겨지지 않았고 음악가 자신들도 그런 대접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예술가로 독립해서 살아 보려고 애썼던 모차르트의 경우가 한 예다. 시민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연주자와 청중이 가깝게 만나며 연주자의 위상이 올바르게 바로잡혀 갔다. 요즘은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있었던 연주자의 카리스마는 거의 없어졌고 연주자의 모습이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팝스타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어렵게 생각되는 클래식 음악을 좀 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끼게 만들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연주자와 청중의 관계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신기하게 여길 정도로 서양 음악에 대한 친화력을 보이면서도 연주자와 청중과의 관계는 아직 올바르게 자리잡히지 못했다. 한마디로 연주자와 청중은 아직 서먹서먹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는 서양음악이 들어온 후 일반인이 듣게 된 것은 최근 몇십 년이며 그 과정에서도 서양에서 형성되어 온 연주자와 청중의 관계가 함께 발전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젊은 연주자와 젊어진 청중들로 인해 그 간극이 많이 좁혀졌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같은 경우는 쇼팽 콩쿠르 1등 상 수상 이후 그의 연주회는 매번 매진으로 표를 구할 수 조차 없다. 연주가 모두 끝난 후 팬들에게 해주는 사인회도 비록 연주자한테는 체력적으로 힘들고 귀찮은 일일지도 모르나 그런 작은 행사로 인해 클래식 음악과 연주자를 대하는 간격이 여느 아이돌 팬사인회처럼 많이 좁아진다. 간혹 그런 작은 이벤트를 취소하는 연주자들도 있다. 연주자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되지만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과거 선배들보다 지금 활동하는 연주자들은 청중과의 관계 설정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야 그 청중들이 다음번 연주회에도 다시 찾아올 것이 아닌가!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이 상대적으로 대중음악 아이돌보다 좀 더 멀리 느껴지는 이유는 유명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 가족들이 헌신적인 노력과 막대한 재정적 뒷받침이 있어야하고 어릴 때부터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면서 레슨을 받아야만 하며 또 비싼 악기를 갖춰야 했던 사람들이라서 돈 좀 있는 집안일 것이라는 점과 어려운 클래식 음악을 업으로 삼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음악은 아무 때고 내가 좋을 때 손뼉 치고 소리 질러도 크게 뭐라 하지 않는 분위기이지만 클래식 음악은 오랜 세월 지켜내려 온 감상을 위한 상식 및 예절이 있다. 악장 사이에서만 박수를 칠 수 있고 연주 중에는 박수를 쳐서도 안 되고 소리 질러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결코 국내에서만의 공부로서는 유명한 연주자로서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연주자는 특히 유명 연주자는 객석에 앉은 사람과 다른 신분의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만도 하다. 상투적인 오해이지만 '클래식 음악은 귀족 문화'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발상도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하루에도 여러 연주회장에서 음악회가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좋은 연주를 만나기 어렵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음악이 음악 자체로서 우리 귀를 통해 마음으로 직접 전달되지 못하고 프로그램에 즐비하게 나열된 학력과 경력을 통해 일그러진 상태로 전달된다면 슬픈 일이다. 우리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벗어나기 위해 고궁을 찾는 심정으로 음악회에 가지만 이런 연주자를 도처에서 만나면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음악 아닌 것으로 평가받는 사람이 적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올바르게 음악을 꾸준히 들어야 한다.
클래식 음악에서 연주자는 어떤 의미일까
일반인인 우리가 실체를 알 수 없고 접근하기 쉽지 않은 '그 어떤 것'을 마주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이 연주자이다. 그것이 일차적으로 작곡가의 소리일 수 있지만 결코 작곡가만의 것이 아니다. 작곡가를 넘어 존재하는 것, 그것은 학문적 진리와 또 다른 그 어떤 '진리'일 수도 있다. 연주자는 작곡가가 얻은 것을 언어보다 더 직접적이고 친근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해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연주자는 우리와 대화할 수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자신이 가진 특권이 세속적인 특권인 양 여기는 사람과 우리는 대화할 수가 없다. 연주자가 음악을 더 잘 아는가? 분명 연주자는 음표라는 '특수문자'를 통해서 일반인이 볼 수 없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특수문자를 올바르게 해석하느냐는 연주자 자신의 역량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이 변변치 않게 해석되어 전달될 때는 우리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흥미로운 것은 연주자들은 보통 무대에서 객석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음악을 본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연주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연주의 기법이다. 연주자들이 다른 연주를 들었을 때의 평을 들어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연주로 깊어진 사람들은 그 이상의 말을 하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나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의 연주를 들으면, 우리는 그분들이 객석에 내려와 우리와 함께 음악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든다. 연주하는 동시에 자신의 연주를 객석에 내려와 듣는 재능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대가(大家)라고 부른다. 펜데믹이 빨리 사라져서 좋은 연주를 연주회장에서 많이, 자주 듣고 싶다.
'잡다한 공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레 속 천일야화 - 세헤라자데(Scheherazade) (0) | 2022.02.05 |
---|---|
프랑스 메츠 국립 오케스트라와 양인모 (0) | 2022.02.05 |
한국 무용 기법이 총망라 된 민속 춤, 승무 (0) | 2022.02.03 |
방탄소년단 퍼포먼스 안무가 손성득 (0) | 2022.02.02 |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작품35 (0) | 2022.02.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