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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공연 이야기

20세기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 야샤 하이페츠

by 매들렌 2022.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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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을 켜는 야샤 하이페츠의 사진
Jascha Heifetz (1901.2.2 - 1987.12.10)

 

 

레오폴드 아우어의 제자들

러시아에서 바이올린의 역사는 19세기 말 유대인 혈통의 음악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였던 레오폴드 아우어는 이들 러시아 악파의 대부로 추앙받는 대교육자였다. 그런 그를 존경한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그에게 헌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테크닉적으로 연주가 불가능하다'면서 가볍게 차 버렸다.

차이코프스키는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당시 러시아에서 레오폴드 아우어의 영향력은 굉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가 연주가 불가능한 곡이라고 찼으니(잘 못썼다는 뜻) 아무도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여곡절이 많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겠다.)

 

레오폴드 아우어는 1896년에서 1918년 사이에 나타난 러시아의 숱한 명 바이올리니스트 들을 길러낸 장본인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예프렘 짐발리스트, 미샤 엘먼, 사뮤엘 두슈킨, 나단 밀슈타인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으며 그 밖에도 토샤 샤이델, 에디 브라운, 막스 로젠 등이 아우어의 손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이 모든 제자들의 이름보다도 아우어를 더없이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의 손에 의해 야샤 하이페츠가 자라났다는 것이다. 하이페츠는 1910년, 그의 나이 아홉 살 때 아우어의 문하로 들어갔다. 나중에 하이페츠는 "신동들은 대개 나중이 되면 치명적인 퇴락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내가 살아남은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라며 운이 좋았던 이유로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집안 분위기와 레오폴드 아우어라는 스승을 만난 것을 꼽았다. 

 

스승 레오폴드 아우어와 동료들과 함께 있는 야샤 하이페츠
앉아있는 레오폴드 아우어, 왼쪽 막스 로젠, 야샤 하이페츠, 에디 브라운, 토샤 샤이델, 텔마 기븐

 

 

아우어 문하에서 체계적인 교육은 받은 지 1년이 조금 넘은 1911년에 야샤 하이페츠는 아르투르 니키슈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하면서 세상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세기의 천재가 등장함은 동시에 수많은 동료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쓴잔을 마시게 하는 일이었다. 음악학자 헨리 로스는 하이페츠로 인해 빚어진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풍부하고 강렬한 음색을 자랑하던 토샤 샤이델은 할리우드 레코드계로 떠났으며, 예프렘 짐발리스트는 요제프 호프만의 뒤를 이어 필라델피아에 있는 커티스 음악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뛰어난 테크니션이었던 에디 브라운은 라디오 방송국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전설적 연주자 미론 폴리아킨은 미국에서 몇 년 간 거주하다가 다시 소련으로 돌아가 1939년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일흔여덟 살 때 녹음한 사라사테의 <하바네라>를 들어보면 그가 만만치 않은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동시에 하이페츠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드러난다. 탁월한 서정적인 연주를 들려주던 막스 로젠은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후바이의 제자였던 셰프치크와 나이즐 역시 상대적인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미샤 엘먼만이 1917년 야샤 하이페츠의 미국 데뷔 이후에도 오십여 년간이나 명성을 지탱해 나갔다. 하지만 마지막 사십여 년 간 그가 받은 출연료나 연주 계약 등은 결코 하이페츠에 미칠 수 없었다. 그 밖에도 1890년에서 1905년 사이에 태어난 많은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그런 처지로 전락해 버렸다. 세계의 모든 오케스트라와 음악 학교는 모두 하이페츠의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바이올리니스트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훨씬 낮아졌을지도 모른다.

 

 

 

극도의 집중력, 강력한 에너지

하이페츠의 연주 사진이나 비디오로 남아 있는 그의 연주 모습을 보면 그토록 한결같이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또 있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꼿꼿이 선 채로 바이올린을 높이 치켜들고 거의 무표정한 상태로 몰입해 있는 모습이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표현력의 부족이 아니라 타고난 극도의 집중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는 온 신경과 힘과 사고를 하나로 모아 조금도 남김없이 연주에 몰입한다.  희미한 미소나 찌푸리는 이맛살조차도 연주에 방해된다는 듯이 말이다. 

 

그의 활 잡는 법은 활을 팔목 위쪽에 놓고 집게손가락의 누름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아우어의 방식이었다. 몸에서 떨어진 좌우 팔꿈치의 움직임은 현에 강한 압력을 가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거기에다 손가락 끝의 힘으로 생성되는 강렬한 비브라토가 더해져서 찬란한 광채를 가진 음색을 탄생시켰다. 음악학자 헨리 로스는 하이페츠는 지판의 어느 위치에서든 모든 손가락을 조화시켜 이 독특한 비브라토를 구사할 수 있었다면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에서 아주 느린 속도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그의 뛰어난 템포 조절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그가 처리해 낼 수 있었던 음의 영역은 다른 어느 바이올리니스트보다도 광범위했다고 말했다. 

 

1920년대의 야샤 하이페츠의 모습
Jascha Heifetz, 1924년

 

 

그와 같은 연주법 상의 개성뿐만 아니라 그는 극도의 집중력과 대담함, 가까이하기 힘든 위엄, 격렬한 에너지, 완벽한 컨트롤을 보여주었다. 그로 인해 그의 소리는 힘이 넘쳤고 기존 바이올린에 항상 따라다니던 애상스러운 분위기를 제거했다. 그가 만들어내는 음향은 순수하고 맑게 트인 인토네이션과 명확하면서도 거침없는 프레이징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그의 빠른 템포가 어색함을 주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의 다소 과장된 듯한 빠르기와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한 슬라이드 주법 및 포지션 이동 등은 때때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차가운 완벽주의자

누군가 야샤 하이페츠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 까닭은 아마도 그의 정교한 손놀림과 몸짓 때문에 하는 말일 테고 또 누군가가 하이페츠를 가리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까닭은 그가 언제나 음악에 대해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본능과 같은 분석력이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며, 그래도 또 누군가가 그에 대해 '차가운'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다. 그는 차가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이페츠처럼 자신의 감정을 탁월하게 조절하는 음악가를 본 적이 없다. 

 

그는 한 곡당 적어도 한 주 아니면 두 주 동안은 연습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매일 오전 열 시부터 한시까지는 기본이고 오후에 다시 모여 몇 시간이고 연습해야 했다. 그는 가끔 의도적으로 다른 이의 연주를 듣지 않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청력이 우리가 앞서 연주한 방식에 젖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래야만 다시 '신선한 귀'로 서로의 연주를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일화

1913년 야샤 하이페츠가 라이프치히에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G단조를 연주할 때였다. 그 자리엔 당대를 풍미했던 바이올리니스트 크라이슬러와 짐발리스트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당시 불과 열두 살이었던 하이페츠의 연주를 듣고 크라이슬러는 짐발리스트에게 말했다. "자네나 나나 이젠 바이올린을 내던져 박살 내는 편이 나을 것 같네."

 

독설가로 유명한 버나드 쇼가 1920년 5월 5일 런던 퀸즈홀에서 열린 하이페츠의 런던 데뷔 연주회를 들었다. 감격한 그는 열아홉 살의 그에게 당신같이 초인적일 정도로 완성된 연주를 함으로 행여 신의 질투를 사게 되어 당신이 요절하지 않을까 걱정되니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주 서투르게 연주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음악 애호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하이페츠의 연주를 듣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다. 뉴욕 야외 스타디움에서 브람스 교향곡을 협연할 당시엔 2악장 초입부터 이슬비가 오기 시작했다. 2악장이 끝날 무렵엔 꽤 많은 비가 내렸고 이 때문에 그는 연주를 그만두려고 했다. 그러나 관중들은 비 맞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이 꼼짝도 앉은 채 '계속해라, 하이페츠!'를 외쳐대는 바람에 그는 할 수 없이 3악장을 시작했다. 3악장 연주부터는 바람까지 부는 통에 그 역시 비에 젖은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청중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이 공연이 끝난 후 하이페츠는 생애에서 가장 감동적인 연주회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인기는 비단 영국이나 미국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루마니아 연주회 때는 극장 앞에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정부에선 120명의 경찰들을 동원해서 질서를 잡으려고 했는데, 이 경찰들의 경계가 어찌나 삼엄했는지 정작 하이페츠 자신까지도 입장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내가 오늘 연주할 바로 그 사람이라고 몇 번을 말해도 믿질 않았고 나중엔 거의 사정조로 얘기해 보았지만 상관의 명령이라면서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결국 어찌어찌해서 들어가긴 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직전에 그의 런던 연주회가 또 있었다. 당시 하이페츠 공연이란 말 그대로 <대사건>이었고 당연히 영국 국왕 부처도 함께 참석했다. 연주가 끝나고 그는 국왕 부처에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올렸다. 왕비는 그에게 인자한 미소를 보냈고 하이페츠 역시 미소로 답했다. 다음날 아침, 버킹엄 궁전에서 사람이 찾아와 국왕께서 친히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청을 전했다. 그는 너무 놀라서 그 청은 따르겠지만 믿어주십시오, 왕비께서 먼저 미소 지으셨다니까요라고 말해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고 한다. 

 

 

가장 완벽에 가까웠던 인간

이제 우리에겐 그의 레코드만 남아 있다. 우리 세대가 말할 수 있는 하이페츠란 그가 남긴 수많은 레코드에 대한 증언밖에는 없을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를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하이페츠를 꿈꾼다라는 말도 그렇게 큰 과장은 아닐 것이다. 인류 역사에는 실력은 있지만 각광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리 특별하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스타덤에 오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야샤 하이페츠는 실력과 인기를 함께 지닌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핀커스 주커만은 <바이올린을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하이페츠의 레코드를 들어야만 한다, 예술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한 세기에 얼마 되지 않는다. 하이페츠는 그중에서도 단연 첫째에 올라야 한다. 그는 우리 바이올린 연주자들 중에서 제왕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Long Live The Emperor!>

 

역사적으로 절대 완전한 연주자는 아직 없었다. 그래도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하이페츠 외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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